#25. 관계를 망칠 수 있는 생각과 행동

by 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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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디자이너와의 만남]


여행을 하면서 틈틈이 일기를 썼어요.
그냥 글만 쓰기는 재미가 없어서
그림도 그리고 지도도 그리고 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반응이 좋았죠.
그래서 이런 걸 만들기 시작했어요.


치앙마이 시내를 떠돌다가 한 카페가 나의 시선을 끌었다. 평범한 카페였지만 구석에서 무언가 열심히 만들고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누런 종이를 열심히 자로 이리저리 재어가며 알맞은 사이즈로 자른 종이를 작은 노끈으로 엮어 노트 같은 걸 만들고 있었다. 그녀 주변에는 그렇게 만든 크고 작은 수많은 노트들이 쌓여갔다. 판매가 잘 되고 안 되고 상관없이, 노트를 만들면서 줄곧 미소를 띠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참 인상 깊었다.

그 옆에는 자신이 직접 기록한 여행노트도 있었다. 한 번 봐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허락을 구했다. 그녀는 얼마든지 보라며 자신의 노트를 빌려주었다. 그녀의 여행 노트는 빼곡하게 꽉꽉 채워져 있었다. 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정리한 알짜 여행정보들도 볼 수 있었다. 내용의 흐름과 전혀 상관없이 생뚱맞게 등장하는 그림이 있기도 했고, 사연이 담긴듯한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특별한 지도도 있었다. 그냥 진짜 멋있었다. 꼭 다른 이들한테 인정받는 가치가 담긴 것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이야기가 꼼꼼히 담긴 스토리북을 가지고 있다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노트 한 권을 구입하고 싶었다.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 또한 일기장에 앞으로의 여행을 사진과 글로 정리하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온라인으로만 정리하곤 했었는데, 그녀의 작품을 보며 손 때묻은 아날로그 기록이 주는 매력이 확실히 더 크다는 게 느껴졌다. 중간 사이즈 노트로 한 권을 주문했다. 그녀는 새 거로 이쁘게 만들어주겠다며, 아주 재빠르고 능숙한 실력으로 나의 노트를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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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멋대로 생각해서 생겨난 불화]

치앙마이를 떠나 빠이로 떠나기 전날, 나는 그녀에게 혹시 엽서도 만들 수 있냐고 물었다. 고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엽서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시중에 파는 것으로 보낼 수도 있었지만 내가 직접 찍은 사진으로 엽서로 만들어 보내고 싶었다. 치앙마이에 있으면서 엽서를 출력할 수 있는 곳을 찾아봤지만 결국 찾지 못했었다. 나는 빠이에서 일주일 정도 있다가 다시 내려올 건데, 혹시 그 시간 안에 만들 수 있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촉박할 것 같긴 하지만 만들 수 있을 거 같다는 말을 해주었다. 엽서의 경우는 자신이 만드는 게 아니라 외부에 있는 공장에 의뢰를 맡겨야 하는 것이라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확실치 않을 경우, 잘 부탁을 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엽서를 만들 수 있는 곳을 찾기 너무 어려워 그녀에게 작업을 부탁했다. 조금 불안하긴 했다. 혹시나 기간 내에 만들지 못한다면, 나는 엽서를 받지 못한 채로 방콕으로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후불 결제가 가능하냐고 물었다. 그녀는 괜찮으니 대신 꼭 찾으러 오라며 당부의 말을 남겼다.

엽서 제작 완성이 되면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주기로 했다. 확인되면 찾으러 가겠다고 했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녀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빠이를 떠나는 전 날까지도 그녀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 메시지를 먼저 보내볼까도 했지만 괜한 부담감만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선뜻 먼저 보내지를 못 했다.

빠이에서 치앙마이로 돌아가는 날, 원래는 치앙마이에서 하루 숙박을 하고 방콕으로 내려갈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일정에 변경이 생겨 빠이에서 치앙마이로 바로 내려가야 되는 상황이 됐다. 중간에 카페에 들려 그녀를 만나고 갈 수 있는 시간이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갖고 있는 짐이 너무 많았고 버스터미널과는 다른 방향에 위치해 있었다. 엽서 제작이 끝났다는 메시지도 받지 못한 상태였기에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곳까지 가는 것이 너무 버겁고 귀찮게 느껴졌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들리지 않고 바로 방콕으로 가는 버스 티켓을 구매하여 방콕으로 돌아갔다.

방콕에 도착한지 3일 정도 지나 그녀에게서 페이스북 메시지로 연락이 왔다. 엽서 제작이 다 됐는데 왜 약속한 날에 나타나지 않냐라는 메시지였다. 나는 당황했다. 정말 엽서를 다 만들어서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이미 치앙마이에서 1,000킬로 미터나 떨어진 방콕에 있는 상황이었다. 상황을 그녀에게 설명했고 그녀는 약간 화가 난 듯이 나에게 답했다.


제가 늦더라도 꼭 만들어 드린다고 했잖아요.
당신 때문에 공장에 무리하게 부탁까지 했는데
이렇게 그냥 가버리셔서 조금 실망스럽네요.
방콕 주소만 알려주세요. 엽서를 보내드릴게요.


나 또한 왜 다 만들었다고 메시지를 주지 않았냐며 변명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정신이 없어서 메시지를 보내지 못한 건 미안하지만 서로 약속한 시간인데 어떻게 말도 없이 갈 수 있냐며 더 큰 화를 냈다. 생각해보니 내가 먼저 연락해서 물어볼 수도 있는 건데, 그러지 않고 내 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 잘못도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약속한 것은 확실했다. 불분명하더라도 찾아가는 것이 맞는 행동이었는데 그러지 못한 내 잘못이 더 컸다.

그녀는 비록 나에게 실망하고 화도 났지만, 이미 나온 엽서이니 방콕으로 나에게 보내주겠다고 했다. 나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엽서 비용을 치앙마이에 있는 친구를 통해 전달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서로에게 신뢰를 잃어버린 마당에 비즈니스가 무슨 소용이냐며 절대 받지 않겠다며 사양했다. 대신 다음부터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기 앞서, 나의 부주의한 행동으로 인해 참 소중한 추억들이 한순간에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참 동안 아무 말없이 하늘 만을 바라보며 지냈다. 신중하지 못했던 처사 하나로 좋은 시간들이 내게 참 부끄러웠던 기억으로 변질됐다.

그녀가 나에게 주었던 여행 노트는 결국 채워나가지 못하고 가지고만 다니다가, 3개월 후 인도 스리나가르에서 결국 버리게 됐다. 쓸모 없어서가 아니라,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 때문에 더 이상 일기장을 써 내려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참 부끄럽고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여행의 편린이지만, 이 사건을 통해 나는 자기 생각이 인간관계를 얼마나 크게 망칠 수 있는지를 뼈아프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부끄럽고 생각하기 싫은 기억이지만, 글로 남기는 이유는 앞으로도 나의 글 속에서 행복하고 즐거운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다. 글을 쓰는 것은 누군가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시간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말대로, 자서전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을 수 있으니까. 비록 아픈 기억이지만 나에게는 큰 자양분이 되어주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사진 / 글 폴작
작가블로그 walking-studio.com
작가인스타 @walking_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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