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을 받는다는 것]
태국을 떠나기 이틀 전, 약속대로 병수 삼촌댁의 가족사진을 찍으러 갔다. 두 달간 나를 돌보아 주신 것에 대한 보답이며 선물이다. 사진 찍어드리러 갔는데, 도리어 비싼 밥을 사주셨다. 그것도 점심은 새로 지은 럭셔리한 쇼핑몰에서. 마지막 날 저녁은 방콕의 가장 높은 빌딩에서 방콕 야경을 볼 수 있는 럭셔리한 중식 뷔페에서. 인도 가면 제대로 못 먹는다며,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가야 한다며, 최고의 것으로 대접해주셨다.
드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사진 몇 장이 전부인데 삼촌은 자꾸 주셨다. 더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있는 게 없었다. 사진을 더 많이 찍어 드린다 한들, 도저히 채울 수 없는 은혜였다. 공항으로 떠나는 순간, 삼촌은 또 다시 나에게 300달러를 손에 쥐어주셨다. 거절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단순히 물질적 가치를 넘어선 그 이상의 진심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존심이 엄청 세다. 빚지고 사는 걸 죽는 것만큼이나 싫어했다. 20대 돈을 많이 벌고 싶었던 이유도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했던 것이 아닌 적어도 다른 사람한테 빚은 지면서 살고 싶지 않아서였다. 친구들과 만나면, 늘 내가 사려고 했고, 돈이 없으면 사람을 아예 만나지도 않았다. 그만큼 도움받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나였다. 하지만 그러한 나의 태도가 그동안 상당히 많은 이들에게 상처가 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여행을 하다 보니 도움을 잘 받는 것도 잘 나누며 살기 위한 꼭 필요한 훈련이라는 것을 배웠다. 남에게 도움을 잘 받는 법을 모르면, 무언가를 나눌 때 우월의식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내가 이 정도 되니까 너네들한테 주는 거야'라는 마인드가 자기도 모르게 생긴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에게 도움을 잘 받아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남에게 도움을 받아오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나눌 때에도 나누는 태도가 달랐다. 자기가 무엇이라도 되는 양 베푸는 태도가 아니라, 그동안 자신이 받아왔던 도움을, 지금 이 순간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사회적으로 마땅히 환원을 해야 한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나약한 나를 질책해야 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앞으로 더 많은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나누며 살라는 성장을 위한 신호였다.
상대의 진심을 단순히 물질적인 가치로만 판단하지 말아야 했다. 특별히 내가 부탁하지 않은 도움을 주시는 분들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돕는 분들이셨다. 오히려 그들에게 물질적인 무언가로 되돌려 드리려는 노력이 그들의 진심을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했다. 결코 규모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 나의 진심과 열심을 그곳에 쏟을 수 있어야 했다.
삼촌께서는 젊을 때 도움을 받는 것에 너무 부담을 갖지 말라시며 나에게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젊을 때 할 수 있거든 하고 싶은 걸 다 하며 살아라.
그래야 앞으로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방콕에서 사진을 인쇄할 곳을 찾았다. 포토프린터가 있었지만, 삼촌에게만큼은 커다란 사진으로 뽑아 액자로 걸어드리고 싶었다. 구글링을 해봤지만 태국어로 설명이 되어있어 여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집에서 지하철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사진관 하나를 찾았다. 떠나는 날은 비록 토요일 밤이었지만, 방콕의 사진관이 금요일까지 밖에 안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기에 무조건 오늘 안에 인화를 해내야 했다.
문을 5시에 닫는다는 문구를 보고 헐레벌떡 뛰어갔다. 지도에서 표시된 장소로 찾아갔지만 사진관은커녕 비슷한 가게조차 보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가까스로 찾았지만 사진관이 아닌 갤러리 카페 같은 곳이었다. 헤매는 바람에 10분이나 늦어버렸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 이미 클로징을 했기 때문에 오늘은 출력이 불가능하단다. 오늘 뽑지 못하면, 나는 삼촌에게 액자를 드리지 못하고 방콕을 떠나야 했다. 오늘은 늦어서 사진을 뽑을 수 없다는 말을 반복하는 직원에게 간곡히 부탁을 했다. 직원은 뽑아줄 수 없는 난감한 입장을 피력하면서 잠시 고민을 하더니, 옆에 있는 백화점에 가면 코닥 사진관이 하나 있으니 그곳에 가보라고 추천을 해주었다. 그곳은 6시에 문을 닫으니 지금 빨리 가면 출력을 할 수 있을 거라며.
옆 건물로 미친 듯이 뛰어갔다. 엄청난 습도를 자랑하는 푹푹 찌는 방콕의 날씨였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제시간 안에 도착하는 게 지금 더 중요해! 더운 것도 더운 거지만 체력이 너무 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운동 좀 해 놓을걸. 평소에 운동을 하지 않았던 게으른 내가 미워지는 순간이다.
백화점 안에 들어 가긴 했는데 또 코닥 매장을 찾는 게 쉽지가 않다. 직원들에게 물어봐도 다 영어를 못 한다. 안내판을 찾고 있는데 한 남성이 나에게 다가왔다. 영어를 잘한다. 그 덕분에 다행히도 코닥의 위치를 찾았다. 그렇게 코닥에 도착한 시간은 5시 40분, 아직 문 닫기까지는 20분이 남아있어! 들어가서 부탁했더니 다행히도 아직까지 인화가 된다고 한다. 야호!!! 결국 해냈어!!
코닥에 액자까지 판매를 하고 있어서 액자에 끼는 것까지 한 방에 해결했다. 좀 허접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우선 미션을 성공을 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감사했다. 삼촌에게 빚진 마음을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코닥 직원에게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저질 체력으로 여전히 헐레벌떡 하고 있던 나를 보며 그는 웃더니, 사진을 찍어주었다. 아 근데 젠장 초점이 나갔네.
또다시 집으로 뛰어가야 했다. 삼촌과 식사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7시까지 가야 했는데, 트래픽 때문에 한 시간이나 늦어버렸다. 삼촌한테는 비밀로 하고 온 거라서, 다른 핑계를 대며 양해의 양해를 구하고 가까스로 식당에 도착했다. 가쁜 숨을 다스리기도 전에 삼촌에게 액자와 편지, 그리고 출력한 사진이 몇 장 들어있는 선물 보따리를 건네 드렸다.
당황스러워하시던 삼촌은, 보따리를 열어보시더니 액자와 편지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보이셨다.
고맙다. 수고했다. 이제 밥 먹자.
비록 삼촌께서 내게 주신 것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선물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삼촌 덕분에 앞으로 어떻게 여행을 해야 할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어떤 도움이든 감사하게 받고, 아무리 힘들어도 내게 누군가를 도울 상황이 온다면 결코 인색하게 살지 않기. 인도로 떠나기 전, 이러한 생각과 다짐은 결국 나에게 인도에서도 또 다른 수많은 이야기들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아주 소중한 자산이 되어주었다.
사진 / 글 폴작
작가블로그 walking-studi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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