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88 임신 12주 차. 티끌이 손발 처음 보는 날
내가 평범하게 학창 생활을 마치고 스무살이 된 해에 엄마가 진지하게 나를 부르더니 알려줄 비밀이 있다면서 오른손 엄지가 두꺼운 이유를 알려줬다. 그전까지는 내가 어렸을 때 손가락을 많이 빨아서 그랬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아니었다. 엄마는 처음 아이를 갖고 행복한 마음이 가득했는데 출산 직후에 내 손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하셨다. 외할머니 오른손 엄지가 육손이었는데 시골에서 숱한 창피를 당하셔서 이모들이 돈 모아서 수술시켜드렸는데, 내 손을 보니 오른손 엄지 바깥쪽으로 손가락이 하나 더 보였다 하셨다.
처음 보는 예쁜 아이가 얼마나 안쓰러우셨을까. 내가 태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수술했고 남들과 다르기에 창피해할 아들을 위해 20년 동안이나 그 비밀을 가슴에 묻고 계셨다. 다른 16명의 사촌은 다 정상인데도 하필 나한테만 그 유전자가 왔다. 성인이 되어서 이 사실을 알아서 그런가, 전혀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남들과 다르기에 더 내가 돋보인다고 생각이 되었다.
아내는 이런 사실을 알고도 나와 결혼해주었고, 아이 손가락 발가락을 확인하러 초음파를 보기 전까지 얼마나 두려웠을까. 나는 육손이라는 부담을 넘겼기에 아들이 육손이어도 넘길 수 있지만, 아내는 이 부담이 얼마나 컸을까. 12주 차가 되어서 아이의 손가락 발가락을 볼 수 있기에 바로 초음파를 보러 갔다. 티끌이가 ‘엄마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하는 마음이었는지 손가락 발가락을 움직이지 않아 줘서 초음파를 잘 찍을 수 있었다. 양 손가락 다섯 개씩, 양 발가락 다섯 개씩. 정상이다. 너무 감사하다.
아내는 입덧이 심해진다고 입덧약을 처방해달라고 의사에게 부탁한다. 티끌이 때문에 엄마가 힘들어하는데, 세상으로 나오면 엉덩이를 찰싹찰싹 쳐줘야겠다.
D-160 임신 16주 차. 티끌이 초음파 – 성별검사
“여보, 티끌이는 어떤 성별이면 좋겠어?”
“나는 딸이면 좋겠어.”
“나는 아들이든 딸이든 다 좋아.”
난 새로운 생명을 가진 것만으로도 벅찬 마음에 아들이든 딸이든 너무 감사하다. 내가 남자라 그런지 아들이면 더 좋겠지만 무슨 상관이랴. 아내는 언니와 본인 2명 다 여자여서 여자아이와 친구처럼 지내고 싶었던 것 같다.
병원을 가서 확인하니 ‘파란 게 보이네요’라고 하시는데 처음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뭐가 보인다는 것인지... 진료실을 나와서 아내가 남자아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이해했다. 아내는 티끌이가 남자아이라 조금 실망한 표정이지만 여자보다 남자가 더 편해서 좋을 것 같다고 웃으며 말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의사는 성별을 32주가 지난 다음에 고지할 수 있다고 한다. 과거에 성별 따라 아이를 선택하던 일부 문화 때문인 것 같다.
아이가 아빠를 많이 닮으면 입덧이 심하다는 속설이 있던데 남자아이라 입덧이 심했던 것일까. 성격은 나보다 아내를 닮으면 좋겠다. 나는 설렁설렁하고 덤벙대고 사람을 잘 믿는데 아내는 항상 의심하고 돌다리를 두드려보고 건너며, 본인에 대한 욕심이 강하다.
여자가 아이를 가지며 엄마가 되는 과정은 놀랍다. 사실 신체적인 조건만 보면 뱃속에 기생하는 생명이 들어있고 그 생명이 태어나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엄마한테서 흡수하는 것 아닌가. 뼈와 치아에 있는 칼슘을 빼서 아이의 골격을 만들고, 본인의 근육을 아이에게 근섬유로 준다. 엄마가 약해질 수밖에 없는데도 이 과정을 꿋꿋이 견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하다.
이제 부모님께 아이를 가졌다고 알려드려야겠다.
D-140 임신 19주 차. 성남으로 이사
송파 문정동에서 성남으로 이사했다. 문정동 집은 다세대주택이었는데, 겨울을 나면서 결로현상이 창틀도 아니고 벽에서 생기면서 곰팡이를 경험했다. 아이가 태어나는 집에서 곰팡이는 상상할 수 없는 환경이라 이사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임대인에게 연락이 왔었다. 본인이 집 담보로 대출을 받고 싶다고. 다세대 특성상 매매가와 전세가가 비슷하기에 대출을 더 받으면 집이 경매로 넘어갔을 때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돈은 전세금 전체보다 적어질 수 있다.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연락이 오셨다. 400만 원을 드릴 테니 계약기간 만료 전에 이사해주면 좋겠다고 말씀해주시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사 가라고 하시는구나 생각되어서 바로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기존에 나는 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에 지출을 줄일 수 있게 가격이 저렴한 다세대, 다가구 위주로 알아보았다. 첫 신혼집도 그렇고 두 번째 문정동 다세대도 그렇게 이사했다. 이번엔 티끌이 때문에 이사하는 것이기에 주거환경이 좋은 곳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때문에 금리도 저금리를 유지하지만 우리는 주택을 구매할 여력은 안 되어서 아파트 전세를 알아보았고 출퇴근이 가능한 성남 야탑역 주위에 5년 정도 된 집을 한 번 보고 전세를 계약했다.
나는 위치가 도심과 조금 멀면서 앞뒤로 자연을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아내는 출퇴근이 가능한 아파트여서 마음에 들었다. 대출을 최대로 받으면서까지 아파트로 와서 부담이 컸었지만, 막상 짐을 다 들여놓고 아내를 기다리고 있다 보니 왜 사람들이 아파트 아파트 하는지 이해가 된다. 아파트에 살아본 적 없던 나는 다세대에 적응했기에 아파트에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몰랐었다. 단지 안에 있는 아늑함과 주택의 큰 부분을 관리해주는 사무소가 있다는 것, 외부인이 진입하기 힘든 구조와 지하 주차장과 연결된 엘리베이터 등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만족도를 높여준다. 이렇게 한 번 경험했으니 앞으로는 아파트로만 이사 다녀야 할 것 같다.
여기서 티끌이가 태어나면 적어도 돌 이후까지는 여기서 생활하겠지? 그나저나 누가 티끌이를 봐주지... 아내 출산휴가 이후에는 장모님이 봐주시면 좋겠는데, 아니면 보모를 쓰는 것도 옵션이 되겠지.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조금 더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