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을 거닐다 Dec 15. 2019

느림의 미학

II. 길 위에서

캄보디아에서 라오스로 들어와 처음 묵게 된 돈뎃. 계획한 것은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이곳에 당도하게 되었다. 라오스 남부 국경 너머에는 시판돈이란 곳이 있다. 라오어로 '4,000 개의 섬'이란 뜻으로, 건기가 되면 크고 작은 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큰 섬이 돈뎃, 돈콩, 돈콘인데, 나는 돈뎃이라는 섬에 머물렀다.


돈뎃의 숙소


내가 묵은 방갈로는 메콩강 앞에 터를 두고 있었다. 해먹이 나란히 걸려 있어 세월을 낚시질하기 좋은 곳이다. 다 좋은데, 시설이 매우 열악하다. 방바닥에는 거끌거끌한 모래가 굴러다니고, 개미 소굴이다. 그나마도 어두워서 개미가 얼마나 많은지 보이지도 않는다. 가끔 물리는 벌레 자국으로 개미가 얼마나 많은지 판별할 뿐이었다. 전기가 잘 끊기고 약해서 휴대폰을 충전하는데 하루가 걸린다. 무엇보다 수압이 너무 약해서 세면대 수돗물은 실 줄기처럼 나오고, 샤워기의 물은 3-4개 구멍 만으로만 졸졸졸 흘러나올 뿐이었다.


처음에는  이 샤워기 물에 적응이 안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차츰 적응이 되자 ‘아 이것도 수행이구나’란 생각을 하게 된다. 샤워기 물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곳에서는 어떤 종류의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재빠르게 몸을 씻는다. 그런데 여기서는 물줄기 하나로 몸에 묻은 비누거품을 아주 아주 천천히 쓸어내리며 그 순간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면서 고요한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이렇게 적응하고 보니 이 또한 나쁘지 않다. 바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좀 오래 걸리면 어떠하리. 시간이라는 흐름에 내 몸과 정신을 맡기는 시간으로 삼자.


이렇게 나름 어쭙잖은 통찰에 다다랐으나...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돈콘의 탓 솜파밋이라는 폭포에 다녀온 날이었다. 더러워진 우리의 꼴을 보고 주인아저씨 왈, 방갈로에 들어오기 전 옆의 화장실 (이 게스트하우스 겸 레스토랑에서 쓰는 화장실) 앞 수돗물로 발을 씻고 들어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수도를 틀었는데, 이게 웬일? 콸콸콸!!! 그 순간 느껴지는 배신감이란...

이런... 방갈로 수압을 조절해 놓았군. 내가 느끼고 깨달았던 수행의 시간은 뭐란 말이냐?


콸콸콸 쏟아져 나오는 수돗물로 발을 씻으며 배신감 섞인 청량감을 느낀다. 그리고 방갈로로 들어와 졸졸졸 흐르는 물로 샤워를 하며 생각해 본다. 그래, 이곳은 물이 부족한 섬. 그 주인네 수돗물이야 빨래하고 밥 짓고 청소하는데 필요하니 그리 세게 나와야 할 터이고, 우리야 이곳에서는 세월을 낚는 여행자가 아니던가. 모든 방갈로에 공용 수도처럼 강한 수압으로 물을 제공하면 금세 물 부족 사태가 올 터이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겠지. 이해가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았더라도 그전에 느꼈던 성찰의 시간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다시 몸과 정신을 시간의 흐름에 맡기며 열심히 몸과 마음을 닦는다.




라오스의 방비엥에 머무르다가 루앙프라방으로 향하는 버스를 탄다. 지도상으로는 멀지 않은 거리인데, 버스로 무려 6시간이나 걸린다. 도로 상황이 안 좋기 때문이다.


긴 거리 여행이라 전자책을 켠다. (보통 종이책의 경우에는 ‘책을 펼친다’란 표현이 맞는데, 전자책은 ‘책을 켠다?’라고 해야 하나?) 책을 펼쳤지만, 아름다운 풍경에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럴 때는 ‘자연 책’을 보는 것이 훨씬 더 나을 듯하다. 누군가 한 말이 떠오른다.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라고.



방비엥의 산세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라오스


한국의 강원도와 비슷한 라오스 산 풍경


변변한 고속도로 하나 없는 라오스. 포장되지 않은 길은 울퉁불퉁... 차는 덜컹덜컹. 자연스레 차의 속도는 늦을 수밖에 없다. 덕분에 나는 천천히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생각해 본다. 과연 고속도로가 잘 정비되어 이동이 빨라지는 것이 좋기만 한 걸까? 무엇을 위해 우리는 빨리 달려가는가? 더 많은 일을 빠른 시간에 처리하기 위해서? 그러면 단축된 시간에 사람들이 더 많은 여가와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되는가? 빠르게 이동하기 위한 고속도로, 고속철도뿐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한 여러 도구들 예를 들면 세탁기, 인터넷, 휴대전화 등이 개발되고 일처리 속도를 빠르게 해 주었지만, 정작 그렇게 벌은 시간으로 개인들은 더 여유로워졌는지 살펴보면, 답은 그렇지 않다. 내 경험으로는 남는 시간에 더 일을 많이 하게 되거나 더 산만하고 분주해질 뿐이다. 오히려 이렇게 느릿느릿 가는 것이 여가이고 여유가 아닐까? 물론 내가 현대사회의 바쁜 일상에서 멀어져 있기에 이런 여유를 즐기는 게 가능한 것일 수도 있고, 바쁜 일이 있다면 아마도 속 터졌겠지. 그런데 또 실상 그 바쁜 일이란 것이 사람이 죽고 사는 시급한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현대사회의 속도전 속에서 바쁘고 급하다고 ‘인식되는’ 일일 게다.




라오스에서  체득한 ‘느림의 미학’을 떠올리니 ,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란 책이 떠오른다.


정신없이 시간에 쫓겨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처럼 바쁘게 살아온 대가로 그동안 고이 아껴서 잘 감아왔던 자유로운 시간의 실뭉치들을 언젠가는 조금씩 풀어가며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많은 과제들 때문에 시달리는 일 없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살 수 있는 그런 자유로운 시간을. 하지만 우리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과연 그렇던가? 이상하게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고군분투하는 피곤한 삶으로서 해방될 순간을 항상 고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뭔가 결핍된 듯한 갈등 속에서 쉼을 얻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독자들은 내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게 될 ‘느림’이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삶의 선택에 관한 문제라는 점을 곧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느 한 기간을 정해 놓고서 그 안에 모든 것을 처리하려고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시간에 쫓기지 않는 그런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우리를 서두르게 만들고 있는 이 사회, 그리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 요구에 따르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과제이다.

느림이라는 태도는 빠른 박자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또한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방비엥에서 루앙프라방으로 오는 길은 험하고 그리 편하지는 않았지만, 느림이라는 태도로 아름다운 풍경에 내 몸과 마음을 맡기니 충분히 보상이 되는 여행이 되었다.




메콩강 석양


돈뎃 방갈로에 앉아 시간을 더디 가게 만드는 메콩강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떤 부자가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한 어부가 자기 배 곁에 드러누워 빈둥빈둥 대는 것을 보고 알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왜 고기잡이를 안 나가시오?

"오늘 몫은 넉넉히 잡아 놨거든요."

부자가 다시 물었다.

"더 많이 잡으면 되잖소?"

이번에는 어부가 부자에게 물었다.

"그래서 뭘 하게요?"

부자가 대답을 했다.

"돈을 더 벌 수 있지요. 그러면 더 큰 배를 살 수 있고, 그러면 거기서 번 돈으로 좋은 그물을 갖출 수 있고,
그러면 또 더욱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어서 그만큼 돈을 많이 벌게 되지 않겠소?
그럼 얼마 안 가서 어선을 한 척 더 살 수 있겠고...
그러다가 어쩌면 거대한 선단까지 거느리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되면 당신도 나처럼 큰 부자가 되는 거요."

그러자, 어부가 부자에게 물었다.

"그러고 나서는 또 뭘 하지요?

부자가 대답을 했다.

"다음에는 편안히 쉬며 삶을 즐길 수 있지요."

어부가 부자에게 물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그거지 않소?"


처음 들었을 때 머리를 ‘띵’하고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바쁘게 열심히 일하는 것은 목적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겠지만, 우리 현대인들은 무엇을 위해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 것인지 잠시 생각해 본다. 그리고 더 나아가 또다시 드는 의문... 이런 풍경이 이방인들에게는 황홀함이지만, 일상이 된 사람들에게도 매번 감동일 수 있을까? 그것은 태도에 달렸겠지. 그런 의미에서 삶을 풍요롭고 생동감 있게 살기 위해서 익숙해짐을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이전 09화 간소한 삶의 즐거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