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면서 몸소 깨달은 것 중 하나는 간소한 삶의 즐거움과 소유하는 삶의 불편함이었다.
장기여행 짐 싸기 편에서도 언급했지만, 처음 장기여행 짐을 쌀 때 짐의 무게는 결국 ‘불안’과 ‘욕심’의 무게와 비례한다. 우리 삶에서 우리가 지고 가는 삶의 무게도 이 불안과 욕심에 비례한다. 살다 보면 명예, 돈, 성취, 인정 등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한 욕망과 그것들을 쟁취하지 못하면 뒤쳐질 것이라는 불안감, 소외될 것이라는 걱정, 사랑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등이 우리를 버겁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질문해야만 할 때가 오기 마련이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에 대한 의구심도 마찬가지이다.
내 여정 중 첫 한 달은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였다. 계절과 기후가 그렇다 보니 주로 여름옷을 입었는데, 최소화해서 몇 벌 밖에 가져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이 생겼다. 여름옷 중 한 번도 입지 않은 티셔츠 하나는 라오스의 방비엥 게스트하우스에 곱게 개어 두고 왔다. 한국에서도 잘 입지 않던 옷이라 상태는 거의 새 옷이었다. 좋아하지 않는 옷이라 여행 와서 입고 버리려고 가져왔는데, 한국에서 안 입던 옷은 여행 와서도 안 입게 되었다. 여행이라고 내 취향이 달라지는 건 아닌 게다. 직원에게 주고 싶었으나 괜스레 입던 옷을 주며 생색내는 꼴이 될까 봐 그냥 침대 가운데 두고 왔다. 새 옷이니 누군가 잘 입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라오스의 루앙프라방에서 중국으로 넘어가기 전 본격적으로 여름옷들을 정리했다. 캄보디아에서 샀던 밀짚모자도 거의 쓰지 않은 새것이지만, 중국으로 넘어가는 나에게는 버거운 짐이었다. 나름 예쁜 모자라 갖고 가고 싶은 마음도 내심 있었고, 인도 같은 곳에 가면 더워질 것이라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한 달간 여행을 하며 짐을 줄이는 것이 여행의 고달픔을 줄이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기에 과감히 포기하기로 했다. 지난번 방비엥에 옷을 두고 오며 그냥 버려지는 게 아닐까 찜찜한 마음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숙소에서 일하는 소녀를 불러서 모자를 건네주었다. 말이 안 통해서 어떤지 모르겠지만, 수줍은 미소를 띠며 좋아하는 듯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으로 넘어가고 네팔, 인도를 거쳐가면서 버리는 기술은 진화하였고, 짐을 간소화해도 사는데 지장이 전혀 없다는 걸 깨달아 나아갔다. 가장 후회되고 스스로 어리석다고 느꼈던 순간은 네팔에서였다. 네팔에서 히말라야를 오를 계획이었고, 그 이후로는 계절이 겨울로 바뀔 테니 겨울 옷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출발할 때가 여름이어서 두꺼운 겨울 옷을 챙겨가려면 짐의 무게가 상당했다. 그래서 묘책을 짜낸 게, 네팔에 도착해서 겨울 옷을 집에서 국제소포로 받는 것이었다. 작전대로 네팔에서 소포를 무사히 받았다. 이때도 소포가 제때 안 와서 애를 태웠으나, 우여곡절 끝에 받고 나서 깨달은 것은 네팔에서도 등산용 두꺼운 점퍼를 어디서나 살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트레킹의 나라인 것을... 이런 장기여행이 처음인지라 경험 부족에서 온 실수였다. 경험해 보면 알게 된다. 그렇게 걱정하고 대비하지 않아도 닥치면 다 된다는 것을. 그래서 불안이나 걱정을 줄이는 방법은 경험해보고 부딪혀 보는 것이다.
그리고 여행이 길어지면, 물건을 버리는 기술에 더하여, ‘아. 나. 바. 다’ 정신이 생긴다. 한때 유행했던 문구인,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고!’ 특히 ‘나눠 쓰고’ ‘바꿔 쓰고’는 장기 여행자들이 갖추게 되는 필수 덕목이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이동하면서 자신에게는 더 이상 필요 없지만, 다음 사람에게는 필요할 수 있는 것들을 나눠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게 된다. 자신에게 한때는 소중했지만, 이제 의미 없어진 것은 아무리 그것이 비싼 것이라도 이동하는 사람에게는 무용지물, 무거운 부담일 뿐이다. ‘이것이 얼마나 값이 나갈까’ 보다는 ‘이것이 지금 나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중심에 두고 가치를 매기게 된다. 그래서 물건에 대해 ‘소유’보다는 ‘사용’에 중심을 두는 습관이 생긴다.
이것은 여행을 다녀온 지금도 지속되는 습관이 되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가 매일 쓰는 물건은 한정되어 있다. 옷도 입는 옷만 입게 되고, 신발도 신는 것만 신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입고 신을 거란 헛된 기대를 품고 옷장과 신발장, 그리고 서랍장을 물건으로 꽉꽉 채워두고 산다. 그러나 장기 여행자로 살았던 경험과 그로 인해 바뀐 삶의 가치와 우선순위, 그리고 무엇보다 간소한 삶의 즐거움을 맛보게 되어서인지 이제는 소유물을 되도록 늘리지 않고, 줄여나가는 삶을 추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안 사고, 안 쓰는 삶은 아니다. 정말 필요한 것인지 분별해서 사게 되고, 불필요해진 것은 쓸데없이 짊어지고 살지 않고 바로바로 처분해서 간소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80퍼센트 파격 세일을 한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구입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소유보다는 경험에 중심을 둔 소비를 지향한다. 소유로 인한 만족감은 오래가지 않지만, 경험으로 인한 만족감은 오래가고, 나를 살찌우는 것이기에 책, 강연, 공연이나 운동, 여행 등 배움과 문화생활 관련된 소비에는 아낌없이 쓴다는 것이 원칙이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나눔으로써 돌아오는 행복도 크기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나 기부도 아끼지 않게 된다.
며칠 전에도 서랍장을 열어 몇 년간 입지 않는 옷과 물건을 정리했다. 헌 옷 수거함에 넣거나 중고마켓에 내놓거나, 아니면 누군가 필요할 만한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여행 중 가방을 비우면 한결 가벼워지고 자신감이 생기는 것처럼 삶에서도 서랍을 비우는 것의 유쾌함과 만족감은 경험할수록 배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