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 중 몇 군데 산을 갔었는데, 가장 인상 깊은 곳 두 곳을 꼽으라면 중국 윈난 리장에 위치한 호도협(虎逃峽; Tiger Leaping Gorge)과 네팔의 안나푸르나이다. 여정을 정해놓고 다니지 않던 나였지만, 이 두 곳은 출발 전부터 생각하고 준비한 곳이었다.
중국 윈난을 여정에 넣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호도협 때문이었다. 호랑이가 넘어 다니는 협곡이란 뜻으로, 매우 깊고 험준한 협곡을 아래에 놓고 걷는 트레킹 코스이다. 언젠가 차마고도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 다큐를 본 이후로 그 길을 꼭 걸어보고 싶다 생각했다. 물론 그 장구한 차마고도 길의 아주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호도협 트레킹을 통해 조금이나마 그 길을 느껴볼 수 있었다. 너무나 인상적인 곳이어서 호도협은 언젠가 다시 한번 걸어보고 싶은 곳으로 남아있다.
히말라야는 워낙 유명해서 설명이 필요 없는 곳일 게다.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컫는 히말라야는 인도 북동부에서 부탄까지 걸쳐있는 긴 산맥이다. 보통 네팔에서 히말라야 트레킹을 많이 하는데,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랑탕히말라야 트레킹이 네팔의 3대 트레킹 코스로 알려져 있다. 에베레스트는 카트만두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트레킹 출발지에 가게 되고, 안나푸르나는 포카라에서 차를 타고 출발지까지 가게 된다. 나는 히말라야도 히말라야지만, 포카라를 꼭 가보고 싶어서 안나푸르나를 선택했다.
호도협에서 만난 사람들
호도협에 가기 위해서 아침부터 호도협 초입까지 가는 버스에 올라탄다. 전날 밤 국경절 연휴가 끝나며 북적북적했던 리장에 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밀려오는 쓸쓸함에 과음을 했던 터라 울렁울렁 속이 말이 아니다. 3시간가량 버스 안에서 나는 시루떡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입구에 도착해서 호도협 입산료를 내고 표를 받는다. 2012년 당시 가격으로 65위안.
버스에서 내려 본격적으로 트레킹을 시작하는데, 속은 울렁거리고 머리는 지끈지끈... 그래도 걸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걷는다. 초입부터 말을 타라며 마부가 따라온다. 나는 말 안 탈 거라며 괜한 헛수고하지 말라 하였지만, "메이꽌시(괜찮아)"라며 계속 길 안내를 한다.
[트레킹 시작 지점]
[내 뒤를 따라오며 호객행위를 하던 마부]
호도협 초입에 마의 구간 28밴드(굽이 굽이 오르는 급경사 오르막길)가 있다고 들어 헉헉대며 힘들게 걸어올라 간 길이 그곳인 줄 알고, 이제 살았다 하는데 뒤에서 마부가 "28밴드 아직 시작도 안 했거든!"이란다. 나는 속이 울렁거려 위 속에 뭔가 집어넣어줄 것이 필요했으나, 이미 첫 번째 게스트하우스인 나시 객잔은 패스해버린 지 오래이고. 가도 가도 식당도 객잔도 나오지를 않는다. 머리가 빙빙 돈다. 마침 간이 휴게소 같은 곳에 도착하니, 벽에 '28밴드가 시작되니 에너지를 보충하고 가라'는 글귀가 쓰여있다. 그래. 여기서 안 먹으면 난 죽는다. 남들은 초코바나 과자를 꺼내 먹는데, 나는 숙취를 해소할만한 게 뭐가 있나 두리번거린다. 아쉬우나마 중국 컵라면을 집어 든다. 맛이 영 이상한데, 이거라도 먹지 않으면 저 굽이굽이 오르막을 어떻게 넘는단 말이냐. 눈 꼭 감고 먹는다. 기름기 둥둥 떠 있는 라면이지만, 그것도 국물이라고 속이 풀리는 느낌이다. 이곳이 최후의 보루인지 따라오던 마부가 계속 협상을 시도한다. "말 안 탈 거야? 저기 28밴드 올라가는데 되게 힘들어." 끈질기게 설득하는 마부를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이왕이면 내 발로 직접 즈려 밟고 싶었던 것. 28밴드 올라가는 길 앞에서 고객을 확보하지 못한 마부들은 그곳에서 발길을 접는다.
이 간이 휴게소에서부터 같은 페이스로 걷게 된 중국 청년 네 명과 발걸음을 같이 하게 되었다. (이후 나는 이들을 C4라고 부른다. 일명 '4명의 Chinese guys'란 의미이다.) 네 명 중 한 명이 그나마 영어를 할 줄 알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들은 자전거로 같이 여행 중이고, 나와 대화를 나눈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친구는 27살 청년으로 IT 쪽에서 일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 중이라 한다. 들어보니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듯. 혼자 다니는 나를 배려해 계속 나와 발걸음을 맞추며 사진을 찍어주겠다 제안을 했는데, 이런 젠장! 카메라 배터리가 방전되었고, 가져온 여분의 2개 배터리 역시 방전되었다. 충전한 줄 알고 그냥 들고 왔는데, 착각이었던 듯하다. 짐 싸는 마지막 순간 충전기를 챙긴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입산하기 전 목욕재계하고 마음을 정갈하게 가다듬고 만반의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늦게까지 술이나 처먹고. 그러나 어쩌란 말이냐. 이미 지난 일인 것을.
내가 배터리가 없어 사진을 못 찍는다 하니 이 중 DSLR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내 사진을 찍어주겠단다. 나는 내 인물 사진이 중요한 게 아니고, 풍경사진이 필요한데... 그래서 조금 친해진 후 조심스레 "저기 저 풍경 좀 찍어서 나중에 같이 보내주면 안 돼?"라고 물으니, 선뜻 자기 카메라를 내어 주며 "네가 찍어."라고 말한다. 이런 착한 친구 같으니라고. 보통 DSLR 가진 사람들은 카메라를 애지중지해서 남의 손에 넘겨주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참 수더분한 친구일세...
영어를 할 줄 아는 차오가 통역을 하는 가운데 이렇게 저렇게 대화를 이어간다. 흔히 나오는 대화 주제로 한국 드라마, 영화, 배우, 가수 등이 화제에 오른다. "너 짱날라 알아?"라고 묻는다. 처음엔 '짱날라? 뭐가 짱나?' 이런 생각이었는데, 언뜻 장나라의 중국 이름이 짱날라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아.. 장나라!! 알아 알지. 그 예쁜 여자?"라고 말하니, 한 명이 수줍게 "어. 너처럼"이라고 말하고, 나머지도 "맞아 맞아"이러며 맞장구를 친다. 어머, 너희들 사회성 너무 좋다 야~~~
[왼쪽부터 샹린, 레이, 쿤, 차오... 샹린과 차오는 후난에서 온 친구 사이, 레이와 쿤은 허난에서 온 사촌지간
샹린은 사진 찍히길 끔찍이 좋아해서 별명이 포토맨이고, 쿤은 DSLR을 가지고 있어 포토그래퍼, 덕분에 샹린은 늘 쿤을 쫒아다니며 자기 사진 찍어달라 매번 졸랐다. 그 모습이 우리들에게 매번 큰 웃음을 주었다. 레이는 흡사 한국인처럼 생겨 처음에 한국인인 줄 알았다. 제일 어린데 제일 나를 많이 챙겨주고 내게 중국어도 많이 가르쳐 준 친구. 차오는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알아 나와 대화를 많이 하고 자기 고민들을 털어놓기도 했다.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여 숙소 정할 때나 밥 먹을 때마다 다른 친구들을 잘 챙겨 주던 친구. 그리고 필요할 때 다른 친구들과 나 사이의 통역을 맡았다.]
28밴드 구간을 지나며 한숨을 돌리게 되니 길은 평탄해지고 여유로운 트레킹이 시작된다. 덕분에 동반자들과 대화도 편하게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어려운 길을 함께 넘기는 과정에서 이 친구들과 완전한 일행이 되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해 다 같이 중도객잔에서 묵기로 한다. 중도객잔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개운하게 샤워를 한 후 식당으로 갔다. 친화력 좋은 C4가 길 중간에 만난 중국인 중년 부부와 젊은 커플, 그리고 3명의 부녀와 이야기를 나누더니 모두 같이 식사를 하기로 결정됐다. 같이 먹어야 여러가지 음식을 골고루 맛볼 수 있다며. 덕분에 커다란 냄비에 나온 '훠궈(중국식 샤브샤브)'와 각종 요리로 배를 양껏 채울 수 있었다. 특히 오골계 같은 닭으로 우려낸 훠궈 국물을 한 사발 들이켜니 그제야 속이 풀리는 듯했다. 모두 중국인들이고 나만 한국인이었지만 하나도 어색하지 않게 나를 배려해주고 환대해 주어 오손도손 가족들과 모여 앉아 식사하는 느낌이었다. 감사의 마음으로 나도 내 배낭에 짊어지고 왔지만 숙취 때문에 꺼낼 생각도 못했던 그 유명한 윈난 복숭아를 깎아 대접하니 너무너무 좋아들 해서 마음이 흐뭇했다.
[첫째 날 저녁. 삼삼오오 따로 온 사람들이지만, 숙소에서 만나 한상에서 다 함께 밥을 나눠먹음]
[다음날 아침 출발 전 다 같이 기념샷. 혼자 1박 2일 등산할 거라 예상하고 온 나에게 생긴 친구들. 오후 산행 후 바로 샹그릴라로 떠난 C4는 리장으로 돌아가는 다른 중국인들에게 나를 잘 부탁하고 떠남. 친절한 나머지 중국인들 덕분에 리장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차오, 샹린, 레이, 쿤과 함께 옥상에 올라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본다. 차오와 쿤은 맥주를 마시고 나머지는 술은 마시지 않고 땅콩을 열심히 까먹는다. 내게 술을 권했지만, 어제 술 너무 많이 먹어 오늘 죽을 뻔했다고 말하니 하나도 안 그래 보였다며 놀란다. 그래 내가 면상은 멀쩡해 보였지만, 속은 얼마나 뒤집어졌었다고.
마침 옆 테이블에서는 그룹으로 오신 한국인 어르신들께서 소주와 맥주를 하고 계셨다. (호도협도 한국 등산객들에게 인기 있는 트레킹 장소 중 하나이다) 객지에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고, 눈이 마주쳤는데 그냥 지나치기도 뭐해 공손히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드렸다.
"한국 아가씨예요?" 물으시고, 혼자 왔다고 하니 깜짝 놀라신다.
"아.. 어째 여기를 혼자서 왔소? 대단한 아가씨구만." 들어보니 울산에서들 오셨단다.
그런데 한 아저씨가 나에게 "옆에 있는 중국 아~들은 누구요?" 하시길래, 길에서 만나 같이 걷게 되었다 하니 "아니 뭘 믿고 저 노마들하고 다녀?"라고 반문하신다.
"아... 오늘 하루 같이 다녀보니 착한 친구들이더라고요. 심성도 착하고, 배려도 깊고.."
"아이고~ 중국 아~들은 원래 앞에서는 말만 뻔지르르 잘해. 속은 모른다고... 이 아가씨 큰일 날 아가씨네. 내가 딸 같아서 하는 소리야."
보아하니 약간 술이 취하신 것 같다. 나쁜 의도로 하신 말씀 같지는 않고 걱정이 섞인 (그러나 반은 가부장적인 태도가 다분한) 이야기인 것을 이해해서, "네.. 조심해서 다닐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았다.
어르신들과 대화를 하고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행 중 조심하고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은 틀림없지만, 한없이 경계의 고삐만 조이다 보면 그에 비례해서 경험의 폭은 줄게 마련이다. 내 느낌을 믿되 적절히 밸런스를 유지하며, 최대한 경계를 확장하고, 많은 것을 수용하는 것! 이것이 여러 가지를 보고 듣고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여행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더불어 사람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기 시작하면, 한없이 의심스럽고 못 믿을 게 사람이다. 여행을 다니는 것이 명소를 찾아다니며 좋은 풍경이나 유물을 감상하는 목적도 있겠지만, 나와는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소통하면서 내 의식을 확장하고 내 안에 자리 잡은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많은 경우 편견은 제한된 경험에서 비롯된다. 다른 문화의 사람들과의 접촉 횟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편견이 깨질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러나 횟수만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더불어 중요한 것은 접촉의 질(quality)일 것이다. 접촉의 질이란 얼마나 깊게 경험하느냐의 여부일 것이다. 아무리 해외로 여행을 많이 다녀도 피상적인 접촉만을 한다면 우리가 가진 편견은 오히려 더 굳건해질 수 있다. 심리학에서 '확증편향'이란 용어가 있다. 일종의 인지적 오류인데, 신념이 너무 강하면 그 믿음에 부합하는 증거나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수집하게 되면서 그 신념이 더 강화된다는 것이다. 호도협에서 나에게 충고를 하신 아저씨의 예를 들면, '중국사람들은 말만 뻔지르르하고 속은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면서 상점에서 판매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과 피상적인 접촉만을 한다면, 그 믿음에 부합하는 경험에 더 주목하게 되고, 그것을 근거로 삼아 자신들이 가진 편견이 더 공고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패키지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외국인과 피상적인 접촉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단체 관광을 하면서도 현지 가이드를 보면서 성실하고 진실하다는 생각을 하며, 선입견을 바꿔 나가는 어르신들도 많이 뵈었다. 그만큼 접촉의 질을 높이는 것은 열린 태도와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에서 출발하는 것일 테다.
아저씨들이 숙소로 내려가신 뒤, 다시 이들과 대화를 이어간다.나는 이들이 어떤 친구 사이인지 궁금해서, "너희는 어떻게 친구가 됐어?"라고 물으니, "우린 길에서 만났어."란다.
알고 보니 이들 네 명이 원래부터 친구 사이가 아니라 차오, 샹린은 후난에서 온 원래 친구이고, 레이와 쿤은 허난에서 온 사촌간이란다. 둘, 둘 자전거 여행을 하다 길에서 만나 서로 친구가 되었고 여기까지 왔단다. 오늘 호도협을 걸을 땐 차오와 레이가 주로 같이 다니고, 샹린과 쿤이 같이 짝을 이뤄 다니길래 넷이 원래 친구인데, 둘둘씩 더 친한 사이인가 했었다. 그런데 이런 반전이!!! "나는 너희들이 워낙 친하길래, 원래부터 친구들인 줄 알았어."라고 말하니, 차오가 감동적인 대답을 한다. "우린 지금 친구야. 길에서 만나도 친구고, 비록 한 시간을 만나도 서로 도우면서 친구가 되는 거지. 너도 당연히 우리 친구고." "그래, 맞다 맞아." 나는 감동적인 눈빛으로 그들을 보며 동의했다. 한국 아저씨들의 기우와 달리 내 사람 보는 눈은 맞았던 게지.
내 다음 여행지가 샹그릴라라 하니, 자기들도 샹그릴라로 간다며 같이 가자고 한다. 그러나 내 짐은 리장에 있는 터라 나는 리장에 들렀다 가야 한다고 말하니, 샹그릴라에서 기다리겠단다. 그래서 또 샹그릴라에서 이들과의 즐거운 인연은 계속되었고, 덕분에 샹그릴라에서 편하게 숙소도 잡고, 차편도 잡을 수 있었다. 샹그릴라에서는 다른 여정 때문에 이틀밖에 같이 있지 못하고 뿔뿔이 헤어졌지만, 이들이 보여준 우정에 코끝이 찡해진 순간들이 몇 번 있었다. 중국어를 못하는 나를 위해 버스정류장까지 마중 나와줬던 순간, 요리를 잘하는 샹린이 만들어준 요리를 함께 나눠 먹던 순간, 이들이 공동경비로 돈을 쓰길래 요리에 쓴 돈을 나도 분담하겠다 하니 나는 자기들의 게스트이기 때문에 돈을 받을 수 없다며 한사코 거부하던 순간, 그래서 내가 귤을 한 봉지씩 사 가지고 와서 이들 손에 안겨줬던 순간. 같이 만난 시간은 얼마 안 되지만, 차오의 말대로 우린 길에서 잠깐 만났지만 함께 있는 동안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샹그릴라에서 다시 만난 C4 / 샹린이 요리해준 사천음식
안나푸르나에서 만난 사람들
포터(porter) 겸 가이드가 되어줄 오르준과 함께 산을 올랐다. 내가 묵고 있는 건물 1층에서 등산용품을 하는 라즈의 먼 친척으로 포터로 소개를 받아 함께 등반을 하기로 했다. 산길을 걷다 보면 오르고 내려오는 사람들과 마주하게 된다. 처음에는 오르준과 단둘이 걷다가 같은 루트로 걷는 사람들과 동행이 되기도 하고, 특히 같은 롯지에서 하룻밤 묵게 되면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며 친해지고 다음날 길을 같이 걷게 된다. 그렇다고 같은 속도로 내내 붙어서 걷는 건 아니다. 여행자에게는 각자의 자유가 허락되며, 함께 해야 할 의무도 없다. 때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운이 좋으면 같은 곳에서 점심을 먹기도 하고, 어젯밤은 다른 롯지에서 묵었으나 오늘은 같은 롯지에서 묵게 되어 다시 만나기도 하고. 열흘 동안 산속에서 있다 보니 거쳐가는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지만, 그래도 자주 보게 되는 동반자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마크와 크랙, 클레어가 그런 사람들이었다. 특히 이들이 특별했던 이유는 내가 힘들었던 날 옆에 있어주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섯밤째에 묵은 도반(Dovan)이란 곳에서 마크와 크랙 그리고 클레어를 만나게 되었다.
안나푸르나에서 다섯째 날, 전날까지 너무 빨리 걸은 것 같아서 걸음 속도를 느리게 해 보기로 한다.속도를 느리게 하니, 어제, 그제 내리막 구간 때문에 생긴 다리의 미세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역시 정신은 몸보다 강하지만, 몸은 정신보다 솔직하구나 싶었다. 다리가 아팠는데, 못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원래 목적지는 뱀부(Bamboo)였으나, 평소보다 느리게 걸어서 조금 늦게 도착했더니 싱글룸이 없단다.사실 방이 있긴 했으나, 주인들이 혼자 온 손님은 안 받으려는 눈치였다. 방 값으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음식 값으로 돈을 버는 구조이기 때문에 내가 더블룸 가격을 지불한다 해도 2-3인분을 먹지 않는 한 타산이 안 맞는 것이다. 오르준의 말로는 뱀부 아래쪽 롯지 주인들은 친절한데 뱀부 이후로 올라가면 불친절하고 돈만 밝혀서 자기도 싫단다. 그도 그럴 것이 위로 올라가면 롯지 수도 적어지고, 재료 조달도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한 구간 더 걸어 도반(Dovan)까지 가기로 한다. 도반도 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다행히 이미 방을 잡고 있던 룸메이트를 구해 방을 같이 쓰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둘 다 미국인 아저씨들. 이런 거 저런 거 가릴 처지가 아닌 데다 산에서 피차 같은 처지라 방을 같이 쓰는 게 더없이 이상하지도 않다. 한 명은 이전 촘롱에서 인사를 나누었던 콜로라도에서 온 크랙이고, 다른 한 명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마크였다.
방에 짐을 풀고, 마당의 테이블에 앉으니 마크가 악수를 청한다. "하이, 난 마크라고 해. 네 이름은 뭐니?"
"난 영이라고 해. (영어니까 그냥 반말로 번역함) 나를 룸메이트로 맞아줘서 고마워."
"사실 크랙이 잡은 방이야. 나도 끼어 자는 처지야.ㅎㅎ"
크랙은 조용한 편이었고, 마크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아저씨였다. 궁금한 게 많은지 질문도 잘한다.
"너는 뭐하니?"
"한 때 회사원이었는데, 지금은 백수야. 여행 다니고 있지."
마크가 껄껄껄 웃는다. "이런 우연이...우리 모두 같은 처지네. 크랙도 무직, 나도 무직, 너도 무직. 우리 모두 현실세계에서 탈출한 난민들일세.(We are all refugees from the real world!)" 그 이후로 회사를 왜 그만두었는지, 여행은 얼마나 하는지, 앞으로 뭐 할 건지... 이런저런 공통의 화두로 우리는 친해지게 된다. 사실 우리가 친해지게 된 것은 사교성 짱인 마크의 덕이 컸다. 마크는 50을 앞둔 변호사로 몇 년 더 일하다가 퇴직하려 했는데, 회사의 일로 그만두게 되었고, 크랙은 (크랙은 나중에 포카라에서 다시 만났을 때 알게 된 사실로 나이가 50. 그런데 초초초동안으로 30대로밖에 안 보인다), 수질 연구소에서 일했었다 한다. 나름 미국의 문과와 이과 출신 지식인들인 듯하여 밤에 침대에 누워 미국 정세와 세계평화에 대해 미국의 상황과 미국인들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물론 그들도 한국에 대해 내게 물어보았고... 흥미로웠던 점은 미국도 진짜 보수는 실종되었고, 근본주의자들만 판을 치고 있으며, 진보라 칭하는 쪽은 중도, 혹은 중도우파 정도쯤 된다고. 그 말을 들으며 한국도 비슷하다고, 그리고 세계적으로 점점 그런 추세로 바뀌어 가는 것 같다고 내가 응수했다. 그리고 이 둘은 미국이 '불리(bully)'적인 면도 있다는 반성적 자각도 갖고 있었다. 얘기가 통해서 좋긴 했는데, 듣다 보니 이들이 미국인들의 대표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어 내가 말했다. "여행과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보통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더라고. 너희들은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 너희들 의견이 미국인들의 의견을 대표하는지는 모르겠다. ^^"
이렇게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평화로운 밤을 보낸 것 같지만, 실은 도반에서 이날은 내게 굉장히 힘든 날이자 ABC(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를 갈 수 있을 것인가 말 것인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날이었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도반에 도착해서 마크, 크랙과 이야기를 나눈 후 차를 마시는데 그때부터 속이 울렁울렁거리는 것이라. 게다가 두통까지.. 산책을 하면 나아질까 해서 산책을 했는데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더니, 결국은 구토를 했다. 이게 고산증인가 하여 카트만두에서 만난 여행자인 유리에게 받은 다이아목신을 먹으려 하니, 크랙의 포터인 숙련된 옴릿이 여기서 다이아목신을 먹는 것은 효과가 없다고 한다. 다이아목신은 1,000m 이하에서 먹기 시작해야 효과가 있다고.. 이미 2,870m인 도반에서 먹는 것은 효과가 없고, 오히려 부작용으로 고생한다 한다. 옆방에 묵는 대만 친구 클레어(나중에 알고 보니 약사였음)가 옴릿에게 아스피린은 괜찮냐고 물어보고 나에게 아스피린을 건네준다. 그런데 그마저도 먹고 바로 토해버렸다. 그날 토하느라 화장실에 들락날락한 게 대여섯 번은 되었을 것이다. 수분 부족이 걱정된다며, 클레어가 가지고 있던 포카리스웨트 분말을 나눠주었다. 너무 많이 주는 것 같아 하나로도 괜찮다고 하니, 자기보다 내가 계속 필요할 거 같다며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토하느라 정신은 없었지만, 클레어의 나눔에 너무나 감동했다.
모두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는 가운데, 나의 포터인 오르준이 내게 말한다. "이렇게 되면 너 내일 MBC(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에 못 가고, 우리는 내려가야 할 것 같아. 아래도 좋은 데 많으니까 너무 낙심하지 말고... 지금 이 정도는 괜찮지만, 더 올라가면 문제가 더 커져." 아쉽기는 했지만, 내 욕심만으로 고집을 피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래 내일도 상황이 이러면 내려가야지 뭐..." 하고 수긍한다. 다이닝 룸에 돌아가 이 소식을 전하니, 마크가 말한다. "너도 알다시피 트레킹은 목표 달성이 아니잖아. 과정인 거지."
크랙 또한 덧붙인다. "장기 여행에서 하나쯤 놓치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야. 너무 실망 마."
다 알고, 수긍하는데 너무 속이 상했다. 누구보다 산도 잘 탔고, 4,000미터 더 높은 고도의 나파하이에서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탔어도 멀쩡했던 나인데... 고작 2,800미터 앞에서 무너지다니... ㅜㅜ
잠자리에 들기 전 또다시 위를 게워내고 나오는데, 숙련된 포터 옴릿이 내게 몇 가지를 묻고 내가 대답한다. 내 이야기와 상태를 종합해본 후 옴릿이 말한다. "이건 누구에게나 흔히 있을 수 있는 증상이야. 건강하다고 해서 안 생기고, 약하다고 생기고 그런 게 아니야. 오늘 밤에 물 많이 마시고, 내일 괜찮아지면 올라갈 수 있고, 그래도 증상이 계속되면 내려가야 할 거야. 내일 한번 보자."
아!이 얼마나 희망적인 이야기인가. 잠을 청하기 위해 방에 들어왔는데, 크랙이 땀을 많이 흘렸으면 염분을 보충할 필요가 있을 거라며, 물에 약간의 소금을 넣어 마셔보라며 소금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마크는 손을 따뜻하게 하라며 자신의 두꺼운 장갑을 빌려준다.
편한 밤을 보내면 좋았으련만, 물만 마셔도 위가 요동을 쳐 두어 번 밖에 있는 화장실로 직행해야 했다. 같은 방을 쓰고 있는 마크와 크랙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조심조심 왔다 갔다 했다. 모두가 잠든 깜깜한 밤 화장실에서 나와 하늘을 보는데 내 머리 바로 위 가까운 곳에서 별들이 쏟아질 듯 빛나고 있었다. 그래, 수많은 별들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자. 이런 증상이 생긴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된 것이리라. 물을 적게 먹은 것, 평소보다 많이 걸은 것, 어제저녁 안 먹던 음식을 먹은 것, 그리고 어쩌면 원래 내 페이스대로 안 걷고 너무 천천히 걸은 것도 원인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산에 대한 나의 오만과 시건방도 일조했으리라. 내내 산을 오르며, '이거 너무 쉽네, 설산 빼면 관악산이나 북한산과 별반 다르지 않네. 별거 아니잖아.'라고 생각했던 나를 발견한다. 그러나 산은 그런 나를 가만 두지 않았다. 사람들은 히말라야의 거대한 설산을 '보며' 겸손함을 배웠다고 하는데, 나는 '온몸으로' 겸손을 배우게 되었다. 그날 밤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이 안나푸르나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보게 될 마지막 별이라 생각하니 금방 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모든 마음을 비운 채 한동안 테이블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이때 본 밤하늘에 박힌 무수한 별들은 아직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이 중 몇 개 별은 어지러워서 보인 별일 수도...
아침에 일어나니 두통과 구토 증세가 말끔히 사라졌다. '오, 신이시여, 혹은 산이시여, 감사합니다.' 마크와 아침을 먹는데, 마크가 옆에 앉아있던 옴릿에게 묻는다. "영이 위로 올라가도 돼?"
옴릿이 내 증세를 묻더니, 올라가도 괜찮단다.
야호~ 마크와 하이파이브를 한다. 뒤늦게 나온 크랙과 클레어도 너무 잘됐다며 박수를 쳐준다.
이들과는 ABC까지 오르면서 같은 곳에 머무르게 되었고, 내려가는 중에는 속도와 코스가 약간씩 달라 헤어졌다 만났다 했다. 클레어와는 하산 중에 오스트레일리안 캠프에 같이 묵으면서 도란도란 깊은 대화를 하며 더 친해질 수 있었다. 나와 동갑내기 친구라 더 반가웠고, 조용하지만 사려 깊은 클레어의 인품에 반하게 되었다. 남자 친구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했는데, 이미 결혼했겠지?
그 이후로 이들과 종종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연락했다. 특히 마크는 아버지처럼 나를 걱정해주었는데, 여행을 지속하고 있는 나에게 이메일로 메시지로 안전을 중간중간 체크해주었다. 한국계 미국인(이민 3세)인 아내가 있어서 언젠가 한국을 한번 방문하고 싶다고 했는데, 아직까지는 기회가 없었나 보다.
왼쪽이 크랙 오른쪽이 마크
ABC에서 클레어와
[하산 중 굿바이 인사를 나눴는데, 최종 목적지에서 우연히 다시 만남. 안나푸르나의 마지막 계단(the last step)을 밟아 내려가기 전 마크의 제안으로 같이 사진을 남긴다. 허그까지 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마크가 한 말, "우리 이렇게 작별 인사했는데 왠지 또 볼 것 같다."라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날 오후 포카라 길에서 딱 마주치고, 그래서 저녁을 함께 먹으며 그때서야 비로소 '진짜' 작별 인사를 함. ]
포카라로 내려온 다음날 옴릿, 클레어, 크랙과 함께
산에서 만난 사람들의 특징
산은 사람을 깨끗하고 맑게 해주는 듯하다. 특히 산에서는 서로 돕고 나누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일상적이다. 사실 산에 오르기 위해 가져 갈 수 있는 물건들은 제한된다. 물자가 제한될 수밖에 없고 희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마음을 연다. 이건 비단 장기간의 트레킹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외국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한국에서 등산을 하다 보면 쉽게 마주하는 풍경이다. 어릴적 아무 장비도 갖추지 않고, 객기로 지리산에 갔을 때 다른 등산객들로부터 음식이나 장비를 나눠 받는 등 따뜻한 도움을 받았던 무용담을 여러 사람에게 들은 적이 있다. 자원이 희소하면 그 자원을 두고 싸우는 게 인간의 생존본능일 텐데, 산은 참 사람을 따스하게 만든다. 물론 그런 따뜻한 사람들이 산을 좋아할 가능성도 있다. 또한 산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고, 일시적인 머무름이니 나누고 베푸는 게 가능한 것일 수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산에서 나누고 베풀고 마음을 여는 태도가 왜 산 아래에서는 어려워질까, 왜 각박해질까란 질문이다. 이 질문을 놓고 이리저리 생각해보았다. 산 위와 산 아래에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 차이는 아마도 연대(solidarity)에 있는 게 아닐까, 산에서는 처음 본 사람도 나와 상관없는 타인이 아니다. 함께 길을 걷고, 같은 목표를 나눠가진 동반자이다. 어느 산이든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산은 크다. 산에 비하면 우리 인간은 미물이다. 산을 오르면 겸허해지는 것이 그런 이유이다. 산 앞에서, 산속에서, 산 위에서 우리는 미물로서 만나게 된다. 서로에 대해 동질감을 갖고 일종의 동지애가 쉽게 싹트게 되는 환경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시간, 같은 산을 오르며 연대감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어느 때보다 나눔과 베풂을 실천한다. 이런 연대감은 여행길 위에서 만난 여행자들 사이에서도 싹트는 것이지만, 산이라는 막힌 공간-역설적이게도 탁 트인 공간이기도 하지만-의 특수성이 연대의식을 더 고양시키는 것 같다.
그리고 산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산에서는 누구나 평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산에서는 경험의 수단은 내 몸밖에 없다. 이동의 수단은 내 두발밖에 없고, 돈을 쓴다 해도 살 것이 매우 제한되어 있으니 소비의 차이도 크지 않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중 샌프란시스코 부자였던 마크도 나와 같은 롯지에서 나와 같은 크기의 침대에 몸을 뉘이고 같은 음식을 먹을 뿐이다. 산은 그런 곳이다. 국적과 나이, 부의 크기와 상관없이 누구나 평등한 조건을 가지고 만나는 곳. 그저 우리는 산을 같이 오르는 동반자일 뿐. 그래서 더욱 연대감이 커지는 것이 아닐까. (물론 네팔에서 등산객과 다른 곳에서 먹고 자는 포터의 입장은 다를 수 있고, 그 차이에 눈을 감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 차이를 계급의 차이로 보지 않고, 현재 수행하고 있는 직무의 차이로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산에서 만나는 동반자들처럼 산 아래 길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에게도 삶의 여정을 힘겹게 오르고 있는 동반자로 여기면 어떨까? 각각 지고 가는 삶의 무게와 종류는 조금씩 다르지만, 이 지구별에서 같은 시대에 머무르는 사람들 아닌가. 저 광대한 우주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미물이다. 같은 미물로서 어여삐 여기고 서로에게 손 내밀 수 있는 그런 마음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