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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을 거닐다 Dec 08. 2019

자연과 풍경이 주는 황홀감

II. 길 위에서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동의 순간 중 하나는 경이로운 자연과 숨 막히는 풍경을 마주하는 순간이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면과 감성적이고 말랑말랑한 면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따라 전반적으로 어떤 성향이 더 우세하기도 하고, 또는 한 사람 내에서도 상황에 따라 어떤 면이 더 우세하게 나타나는 때가 있다. 전반적으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을 우세하게 발달시켜온 나에게 있어 이 여행은 꽁꽁 눌러왔던 내 감성을 폭포수처럼 열어주었고, 그 결과 자연과 풍경에서 잊을 수 없는 감동과 전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첫 번째 잊을 수 없는 전율이 시작된 곳은 캄보디아 씨엠립의 톤레삽 호수였다.


보트를 타고 호수 한가운데에 다다랐을 때 감동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호수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끝없이 펼쳐진 호수의 물이 아름다운 구름이 펼쳐진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호수인지 도무지 경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순간 내가 천국에 온 착각이 들었다. 호수에 갔던 때가 저녁 무렵인지라, 동쪽과 남쪽은 아직 천국 같은 하늘이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는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며 석양의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었다. 같이 간 우리 모두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같이 배를 타고 갔던 동반자들 입에서 “오우~ 뷰티풀!!”이란 감탄사가 절로 나왔고,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아름다운 장관을 담기에 바빴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수 있음을 느낀 시간이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하루 종일 보고 싶은 풍경이었다. 그 감동의 순간은 십 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도 기억나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여행 초반이었던 그때, 남겼던 글의 말미에 이렇게 쓰여있다. ‘앞으로 어떤 풍경에 어떤 감동의 떨림을 느끼게 될지 자못 기대가 된다.’ 여행이 깊어질수록 떨림의 강도는 점점 강해졌고, 그 감동은 기대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톤레삽 호수


해가 뉘엿뉘엿 지는 호수
고기 낚는 어부



두 번째 몰입했던 풍경은 중국 윈난성 따리의 얼하이였다.


햇빛이 쨍 한 어느 날 따리의 유명한 호수 얼하이로 한참을 걸어갔다. 먼 길이었지만, 날씨가 좋아 걸어가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하늘의 구름 사이로 태양 빛이 갈라져 내려온 소위 ‘빛내림’을 만나서 기분이 더 고조된다. 호수 위에 세워진 카페에 들어가 윈난 커피를 시켜놓고 호수의 풍경에 빠져들었다. 커피도 다 마시고, 시간도 한참 흘렀는데, 이 곳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에 좀처럼 몸이 일어서 지지가 않는다. 호수의 풍경에 점점 빨려 들어가 나도 모르게 감탄의 신음소리가 나온다. "하악~~ 하악~~"


순간 생각한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느낌은 어떤 오르가즘 못지않구나.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우선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 더하여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한 감동과 그 밖에 여러 가지 복합된 감정이 실타래처럼 올라와 눈물이 흐르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참 동안 풍경을 감상하며 눈물을 쏟고 나니 후련해져 쉽게 자리를 뜰 수 있는 마음 상태가 되었다. 풍경의 감동이 촉발한 감정으로 인해 정화(카타르시스)를 경험한 셈이었다.


얼하이 가는 길에 빛내림
얼하이
얼하이
얼하이
얼하이



세 번째 나파하이의 감동도 빼놓을 수 없다.


나파하이는 중국 윈난성 샹그릴라에 있는 해발 3,270m에 위치한 고원 계절성 호수인데, 우기에는 호수면이 늘어나고 건기에는 호수면이 줄어드는 곳이라 한다. 내가 갔던 때가 건기라 호수라기보다는 초원의 느낌이었다.


호텔 주인에게 가는 방법을 물으니 자전거로 일주를 할 수 있는 길을 알려준다. 草原(초원)과 牦牛(야크)를 적어주고 이 둘을 보며 자전거를 타고 가면 나파하이를 만나게 된단다. 두어 시간이면 돌 수 있을 줄 알고 먹을 것도 안 챙겨 갔는데,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이 이어진다. 엄청난 규모의 호수였던 게다. 초원을 뺑 둘러서 라운딩을 하는 코스로 중간중간 앉아서 경치도 즐기고 생각도 하느라 무려 7시간이 걸렸지만, 독특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반해 힘든 줄 모르고 행복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초원 풍경


동네 자전거 집에서 대여함. 이렇게 보면 이쁜데, 가까이서 보면 고물 자전거. 이런 자전거로 7시간 종주함 ㅎ
호수면에 반영된 하늘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야크들
말도 있고...


'향수'라는 노래가 떠올라 혼자 노래를 크게 불렀던 곳


중간쯤 달려왔을까.  말과 야크가 뛰노는 (사실은 그냥 서 있는) 넓은 초원과 만났다. 이 전의 야크가 몰려 있던 초원과는 느낌이 또 다르다. 이 평원을 달리는데, 순간 정지용의 '향수(鄕愁)'의 시를 가사로 한 이동원, 박인수의 '향수'라는 곡이 떠올랐다. 비록 이곳은 얼룩빼기 황소가 아니라 검둥이 야크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지만, 그래도 그냥 이 날은 그 노래가 떠올라서 혼자 크게 불러보았다.



이곳은 내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곳이다. 초원 뒤에 위치한 산인데, 초록과 금빛 작은 나뭇잎들이 따사로운 햇빛에 반사되어 바람에 살랑거리며 서로 부딪혀 만들어내는 소리가 어느 음악 소리보다 아름다웠고, 어느 보석의 반짝임보다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나뭇잎들이 햇빛을 조명 삼아 금빛 물결을 이루며, 바람의 지휘에 맞춰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였다. 살아있음으로 인해 자연이 선사하는 공연의 관객이 될 수 있음이 감동스러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행 초기에는 이런 내가 당황스럽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점점 더 익숙해지며 있는 그대로 느껴지는 감정에 나를 기꺼이 내어주는 경험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첫째, 여행 중에는 급박한 순간에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가는 긴장되는 순간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긴장을 풀게 되니 몸과 마음이 이완되었다. 매일 먹고 자는 생존의 목표와 하루하루 경험한 것에서 느끼고 배우자라는 목표만 있을 뿐,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한다든지 어떤 일을 성취해야 한다든지와 같은 목표가 없다보니 에너지를 많이 축적할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이 이완되니 자연스레 감각이 열렸다. 눈구멍, 귓구멍, 콧구멍, 숨구멍 등 온몸의 감각 구멍들이 열리니,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피부로 느끼는 감각이 활짝 꽃피었다.


둘째, 낯선 곳에 던져지니, 한국에 있을 때 발동됐던 타인의 시선과 나 스스로 가졌던 수많은 생각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고 여러 일을 겪으며, 많이 깎이고, 많이 내려놓았고, 많이 자유로워졌다 생각했지만, 여전히 내게는 ‘이 상황에서는 이러해야만 해, 저러해야만 해’라는 당위적인 사고가 남아있었다. 여행 초반부터 낯선 곳에 왔으니 ‘짜잔~’하면서 갑자기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낯선 곳을 걷고, 나와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고, 다른 풍경들을 반복적으로 마주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그런 생각들이 절대적인 법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조그마한 용기를 내어 시도해보니,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쌓였다. 타인의 시선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니  '마땅히 이러해야 해.'라는 당위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성으로 눌러야 했던 정서 그리고 몸으로 느껴지는 감각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었다.


셋째, 여행 중에는 목표보다는 과정에 집중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목적 또는 목표 지향적인 사람들은 자연 주변을 탐색할 겨를이 없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그런 훈련을 받았다. 어딘지 모르게 매번 늦는 아이, 학교에서 집으로 오면서 오만 가지에 관심을 쏟는 아이,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들의 일에 관심을 갖는 아이들이 있다. 예전에는 그런 아이들이 이해가 안 됐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아이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어쩌면 그것이 아이들의 본능이 아닐까.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호기심이 발동되고, 탐구하게 되고. 떠올려 보면 나 또한 꼬맹이 시절에는 그랬던 거 같다. 그러나 점점 커가면서 제도권 교육의 훈련을 받고, 그에 적응해나가고, 취업을 하고,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목적지향적인 삶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주변의 것을 돌아보고, 느끼고, 감각으로 경험하는 힘을 잃어버린 듯하다.  

물론 어떤 일에 대한 목적이나 목표를 세우고 완수하는 과정에서 책임 있게 수행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삶 전체에서의 지나친 목표/목적 지향적인 태도의 문제점이다.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성인들의 일상에 지친 삶의 풍경을 떠올려보자. 아침에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세워 출근 준비를 하고,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고, 회색빛 건물 앞에서 부랴부랴 사원증을 목에 걸고 들어가는 여정에서 무수한 것을 마주하게 되지만, 감각이 굳게 닫혀있기 때문에 실제로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하는 감각 불능의 상태에 빠진다. 

이와 달리 여행에서는 뚜렷한 목적이 없는 경우가 많다. A 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하지만, 시간의 구애를 받는 것도 아니고, B지점까지 꼭 곧장 가야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정해진 이정표에 맞춰 빡빡하게 이동을 해야 하는 패키지여행에서는 조금 다를 수도 있겠다. 관광지 하나 찍고, 또 다른 관광지를 찍는 것이 목적이 되면 시간에 쫓기느라 주변을 음미하는데 제약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여행에서조차도 이동하는 중에 의식적으로라도 감각을 활짝 열고, 새로운 것들을 호기심 있게 바라보려 한다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사실 낯선 곳에 발을 들여놓는 것 자체가 우리의 의식과 감각기관을 흔들어 놓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여행이든 내 주변의 것들이 예민하게 들어오고 의미 있게 보일 수밖에 없다. 역시 감각기관이 열리는 경험이다.


이런 이유들로 여행에서는 내 몸을 열어 자연과 풍광을 있는 힘껏 마주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까지 경험한 것과는 다른 크기의 감동을 느꼈다. 풍경에 몰입하면서 물아일체를 자주 경험했다. 그런 아름다운 풍경에 내 몸이 일체가 되는 느낌을 느끼면서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살아있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고, 짜릿하고도 벅찬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 과정에서 행복감과 충만감이 느껴졌다. 이 장기 여행 전에도 유럽이나 북미 등 여러 곳으로 여행을 다녔지만, 심지어 패키지가 아닌 내 마음대로 일정을 조정할 수 있는 자유여행이었지만, 이 정도의 크기로 감동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어려서였을 수도 있고, 덜 자유로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를 잃어야 그 풍경 자체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데, 내 에고(ego)를 강하게 붙들고 있으면 도달하기 어려운 경험이다. 그랬기에 이전의 여행들은 내 삶을 크게 변화시키지 못했다. 반면에 이 여행은 장기라는 기간도 있었지만, 내 에고(ego)를 버려가는 경험이었기에 이후 내 삶을 크게 흔들고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황홀한 풍경


얼마 전 머리 하러 미용실에 갔다. 7-8년 전 처음 생길 때부터 다녔던 동네 미용실인데, 이제 원장하고 서로에 대해 근황을 기억하고 묻는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물론 나처럼 미용실에 자주 가지 않는 손님이 장사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갈 때마다 내 스타일을 기억해주고 만족스럽게 머리를 해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이 원장은 작년까지도 내가 여행 관련 일을 하거나, 여행작가인 줄 알았단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갔을 때 6개월 정도 아니면 그 이상 머리를 못 할 거 같으니 단정하게 잘라달라고 했고, 어디 먼데 가냐는 원장의 물음에 장기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그리고 돌아와서 치렁치렁해진 긴 머리를 자르고 파마하고 염색하면서 이런저런 내 여행기를 들려주었다. 그것이 뇌리에 깊게 박혔는지, 내가 여행작가 같은 사람인 줄 알고, 머리를 하러 가면 여행지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 조언을 구하곤 했다. 그러다 작년 새로 생긴 여자 친구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심리상담사라는 것을 알았고 그는 1여 년간 건강한 연애 끝에 얼마 전 결혼을 했다. 신혼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서,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보고 또 여행 안 가냐고 묻는다. 내가 말했다. "요즘은 여행욕구가 그다지 크지 않네요."


요즘은 이전처럼 여행욕구가 갈급하지 않다. 그때의 깨달음으로 주위를 보니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바라보면 내가 지금 있는 이 공간과 시간이 감동을 주는 것들 투성이었다. 파랑새를 찾아 먼 곳을 떠나 다녔지만, 결국 파랑새는 내 옆에 있었다는 깨달음처럼, 여행지에서 만난 감동적인 것들이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곳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에게 감동을 줬던 자연의 풍경을 서울에서 그리고 심지어 사무실 근처나 동네에서 마주하면서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예를 들면, 구름 사이로 빛이 쪼개져 내리는 빛내림을 집으로 걸어가는 중에 동네 뒷산을 올려다보다 발견했던 순간이 있다. 빛내림이 어디 대자연이나 공기 좋은 시골에서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는데, 그냥 길가다 동네에서도 마주한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인데 바쁘게 사느라 내 감각을 꽁꽁 닫아두었기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리라. 감각을 열어두니 이제는 보이면서 큰 감동을 소소한 순간순간 느낄 수 있게 되니 굳이 여행을 가야겠다는 욕구가 크지 않다.  


사무실 창가에서 바라본 빛내림


언젠가 서울의 강변북로를 달리면서 파란 하늘에 펼쳐진 흰구름이 강과 맞닿아 있는 풍경에 순간 감동이 밀려왔다. 이전에 캄보디아 씨엠립의 톤레삽 호수 가운데에서 느꼈던 감동이 떠올랐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호수인지 경계를 찾아볼 수 없는 곳 한가운에서 느꼈던 천국에 온 그 기분. 그것과 유사한 기분이 들었다. 운전 중이라 카메라에 제대로 담을 수 없어서 아쉬울 뿐이었다. 잠시 정체된 사이 휴대폰으로 사진 한 장 남기며, 내 눈에 담고 황홀함을 즐겼으니 충분하다고 위안을 삼았다.


강변북로를 운전하다 만난 풍경


내 마음이 열리고, 내 감각이 깨어나면 일상에서도 이렇게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데,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날 필요가 있을까? 낯선 눈으로 바라보면 내 주변이 모두 여행지인데 말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여행 예찬론자이다. 여행으로 인해 내가 얻은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행이 단지 낯선 곳과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 추구로만 점철된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현실에서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한 일시적 처방제로만 사용된다면 여행은 그저 진통제이자 마약 같은 작용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스트레스 풀러 여행 다녀오는데, 그 효과가 지속되는 기간이 점점 짧아진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방증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행을 많이 다녀도 갑갑한 사람들에게, 여행만 다녀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여행에서 깨운 감각을 일상에서도 깨워두면 어떨까라고 제안하고 싶다. 

당신 옆에 황홀한 풍경이 당신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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