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 중등

by 서유현

중학교가 마음에 안 드는 곳으로 발표가 났고

수학학원 레테에서는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속도는

그래, 속도는 맞았지만

깊이가 잘 맞지 않았다.

그렇게 문제가 쉽지도 않던데 이런 문제는 아직 심화문제가 아니란다.


1학년 1학기에 중간 기말고사가 없다는 말은

마지막으로 선행에 집중할 수 있는 한 학기가 남았다는 뜻이 되었다.


학년에 맞는 학원으로 옮겨가 보니

공부의 방식이 어느새 엄마인 내게 익숙한 내신의 방식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알던 맛이라 안정감을 느꼈다.


이 시점에 초등에 어떤 것이 중요하냐고 물어본다면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다. 텅 빈 하얌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터져나간 하얌 같은 것이다.

할 말이 많고 그렇지만 마침내 맞딱 드려야만 깨우쳐지는 것들이 있다.

멀리 보고 한 것만 남는다. 조급함을 원동력으로 순간적으로 폭발했던 것들은 생각보다 남지 않는다.

뭣이 중헌디.

나에게 중요한 것, 아이에게 중요한 것을 하면 된다.


그런데 그러기엔 참 많은 ‘해야 할 것’이 몰아친다.

그래서 늘 몰아치는 그 바람에 휩쓸려 어딘가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나 왜 여깄지?'

나야 뭐 휩쓸려서 왔다지만

휩쓸린 나에게 휩쓸려 내 옆에 앉아 있는 아이는 왜 또 여기 있을까?

아이는 착하다. 엄마가 그렇게 헝클어 놓아도 큰 불평이 없다. 여전히 귀엽다. 내 중등


암튼 매운맛 수학 시험을 본 뒤

아이도 나도 여러모로 각성했다.

시험을 다 보고 나서야 블로그 후기를 찾아보는데

'하. 참 너무 하네.' 다 잘 본 후기만 잔뜩 있다.

이 어려운 시험을 잘 본 사람만

인터넷 세상에 동동 떠 있는 게 나 참 어이가 없다.

500명이 응시하고 430명쯤 떨어지는 시험인데

시험 잘 본 사람만 인터넷에 글을 남기는 바람에

시험에 대한 후기는 시험 잘 본 후기뿐이다.

일단 이 상황에서 좌절하지 않는 것이 우선적으로 내가 할 일이다.


이별의 5단계처럼

내게도 그런 5단계가 지나갔다.

1. 현실을 부정했다. 아이가 정말 이 정도 실력이 아닐 거라 부정

2. 세상에 분노했다. 아니 무슨 애들한테 이만큼이나 공부를 하라고?

3. 다시 재도전해볼까 협상의 마음도 가졌다. 그래 수학학원 네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내가 제대로 준비해서 보여준다.

4. 이 치열한 시간을 어떻게 버텨낼지 걱정과 우울감이 몰려왔다.

5. 그러나 우리가 살아갈 방법을 찾아내야 하지 않겠냐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다행히 이번에는 아이도 나도 털어버리고 일어났다.

주어진 숙제만 겨우 하고 어려운 문제는 못 푼다고 접어버리기 일쑤인 아이이지만

같은 또래와 함께 시험을 보며 능숙히 잘 해내는 듯한 친구들의 모습에 놀라기도 했다.


시험을 보고 온 날 밤,

아이가 풀었던 문제집에 혹시 비슷한 유형이 나왔을까 싶어

문제집을 펴고 비슷한 문제 있었으면 동그라미 좀 쳐보라고 했는데

아이가 정말 한 문제도 없다고 했다.

허탈한 마음. 이 문제집을 아무리 풀어도 레테의 그 문제와 직접 닿는 것은 없었다.

이 문제집을 충분히 이해한 아이가 수학적 사고력을 가지고

새롭고 더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는 방식을 기대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 그건 말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제자리 뛰기를 열심히 많이 했으니 이제 이 점프력을 이용해서 한 바퀴를 공중에서 돌아봐라라고 할 때 그걸 할 수 있는 자는 소수이다. (그걸 해내는 애들이 원망스럽다.)


아이에게 숨겨도 숨겨지지 않는 재능이 있길 바라왔는데

어느 순간 그런 재능 따위는 모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숨겨지지 않는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그 재능 덕분에 자라지 못하는 다른 영역도 가져야 한다는 것도 보인다. 신은 공평하다는 말을 여기다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다 가지긴 어렵다. (물론 또 다 가진 애들이 있어 원망스럽다.)


내신은 고르게 모든 과목을 두루두루 잘하는 자가 강한 영역이다.

이건 쉬울까? 전혀 쉽지 않다. 수학이 어렵지만 국어 영어 사회 과학을 모두 꼼꼼히 잘 해내고 학교에서 치르는 중간 기말고사에서 그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내는 일 역시 수학 못지않게 어렵다.

어쨌든 잘함이라는 것은 수동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닿을 수 없는 영역이라는 뜻인 것 같다.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낫다.'라는 게 나의 가설이다.

이것저것 다 하는 바람에 이도 저도 안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내 인생에서 수동적으로 넘겼던 순간을 아이도 그렇게 넘기지 않았으면 한다.

해봐야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사실 모든 것은 그렇다. 해본 것들만 안다.


예전 같으면 시험 광탈 좌절에 도망가고도 남았을 아이가

지금은 도망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해서 어디까지 가야 할지를 고민한다.

한다고 모든 것이 다 되진 않겠지만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에 대한 감을 키워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중등 입학 전, 초등 졸업 후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꽤나 길게 느껴졌다.

밀도가 높은 시간들이라 마치 여행을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년 이맘때에 ‘작년 겨울에 조금 더 열심히 할걸.’이라는 말은 안 할 것 같다.


이번 겨울은 열심히 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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