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유현 Dec 30. 2022

호캉스 가길 잘했지 모

 연말에는 대체로 여행일정을 꼭 잡는다. 남편 회사가 그나마 연말에 휴가 며칠 쓰는 게 눈치도 안 보이고 괜히 서울 시내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려면 에너지도 너무 많이 들어서 차라리 여행이 낫다고 판단해서다.

 

 하지만 올해에는 아이와 이곳저곳을 장기간 돌아다닌 터라 몸도 많이 지쳤고 자꾸 무너지는 루틴을 바로잡기가 힘들어 예약해뒀던 말레이시아 여행도, 경주 여행도 모두 취소해 버렸다.

 그러고 나니 허전하다. 콤팩트한 여행 없을까? 

 

 호캉스는 아이가 너무 어려서 도저히 어디를 갈 수 없을 때 집을 탈출하고 싶어서 몇 번 가고는 이것도 아니다 싶어 그만두었다. 숙박비도 꽤 들고 아이 짐도 많아서 쉬러 나왔는지 뭐 하러 왔는지 헷갈리더라. 그리고 환기도 안 되는 호텔의 건조함이 잠잘 때 숙면을 늘 방해했던 것 같다. 그러나 장거리 여행에 지친 우리는 짧은 이동거리와 약간의 정신적 환기를 위해 하루짜리 호텔 여행을 가기로 했다.




 다행히 가고 싶은 호텔에 방이 있어서 가격비교 같은 건 생각도 할 수 없이 바로 잡았다. 이 와중에도 하루를 쉬려니 아이 학원에 보강신청을 해야 했다. 보강 날짜를 잡으려고 학원에 전화를 건다.

 " 00 이가 오늘 결석할 것 같아서요. 어떻게 하면 되죠?"

 이 학원은 결석이라고 해봐야 똑같은 수업을 청강하여 그것을 메이크업하거나 그것도 안 되면 학원에 나와 똑같은 시간을 영상으로 수업을 듣고 숙제를 다 마쳐야 하는 고집이 센 학원이다.

 나의 질문에 일주일 내로 보강을 잡아서 듣고 숙제검사까지 마쳐야 한다는 차가운 대답만이 돌아왔다. 아무리 시간을 쥐어짜도 3시간이 넘는 학원 보강을 넣을 시간이 우리 아이에겐 없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논술학원 시간에 이 학원 보강을 가겠다고 일정을 잡았다. 학원을 째서 보강을 하기 위해 또 다른 학원도 째는 도미노 같은 결과가 발생했다. 나 잘하는 짓인가?

 


 잘하든 뭐든 이렇게 대충 마무리를 해야 우리가 떠날 수 있다. 차 타고 20분이면 가지만 어쨌든 캐리어 끌고 차도 끌고 가서 짐 풀어야 여행이 시작되므로 하루 짜리 짐을 싼다. 세면도구부터 여분의 옷과 잠옷, 빨래를 담아 올 봉지와 혹시 모를 상처를 위한 약, 약간의 주전부리 그리고 수영복과 털모자, 두꺼운 장갑까지 생각보다 짐이 많다. 그래도 막상 호텔에 도착하니, 세상 사람 여기 다 모였구나. 연말에는 호텔에 다들 가는 거였구나. 체크인 줄로 로비가 인산인해다. 이상할 정도로 친절하게 우리를 안내해준 호텔리어는 한층 아래로 엘리베이터를 태우더니 한산한 클럽 라운지에 자리를 잡아주신다. '아. 오늘 체크인 보통 오래 걸리는 게 아니구나.'

  


 마음 비웠다. 커피 내리고 쿠키랑 케이크 담아서 햇살 잘 들어오는 창가에 앉았다. 아들은 특별히 먹을 게 없다며 귤을 네 개째 까먹고 있다. 시간이 지나자 슬슬 예민함이 엄습해 온다. "언제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나의 물음에 생각보다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저도 정확히 모르겠어요." 너무나 미안한 미간을 하고서는 본인도 잘 모르신다고 하니 나 정말 까탈스러워질 거야.

 다행히 몇 분 후에 남편이 불려 가서 체크인을 하고 돌아왔다. 신용카드 혜택을 이용한 호텔 예약이었는데 덕분에 뷰가 조금 더 좋은 방으로 업그레이드가 됐다. 기분 상하려고 했던 순간들이 해소되었다.




 오늘은 아이에게 YES DAY를 해주기로 했다. 뭐든지 오케이다. 게임을 냅다 한다. 그럴 줄 알았지만 그래주려고 한다. 너에게도 기분 좋은 일들이 좀 생겨야지. 사람은 생각보다 사소한 기분으로 많은 것이 좌우되는 것 같다. 게임하다가 룸서비스시켜서 밥 먹고 TV 보다가 날이 어둑해지고 조명이 연말스럽게 들어오는 밤이 되었다. 이 조명에 스케이트를 타려고 여기에 왔다. 호텔 안에 있는 스케이트장에 가서 난생처음 내 아들이 스케이트를 탄다. 추워서 중간에 어묵탕도 먹고 다시 스케이트를 타다가 갑자기 눈이 온다. 이 순간! 아름답다. 하필 우리가 스케이트를 탈 때 눈이 오는 거냐며 운도 좋은 것 같고 기분도 최고다. 이 정도면 행복한 연말이다.


 방에 들어가서 고소한 맛 꼬깔콘과 트러플 새우깡을 뜯어서 한참을 먹고 연예대상을 시청했다. 그러다가 너무 졸려서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어릴 적엔 참 좋았다. TV를 보다가 소파에서 잠이 들면 아빠가 방으로 안아서 옮겨다 줬었는데 엄마가 되고 난 뒤로는 소파에서 TV를 보다가 잠든 적도 거의 없고 잠들면 내가 다시 일어나서 내 발로 방에 들어가서 자야 한다. 뿐만 아니라 TV도 내가 끄고 불도 내가 끄고 집안의 온갖 잠금장치도 한번 생각해보고 아들이 차낸 이불도 덮어주고 그리고 내 발로 침대에 가서 잔다. 오랜만에 침대에서 TV를 보다가 잔 게 또 너무 행복하다.


 하지만 자면서 생각한다. 내일 아침 조식 줄이 치열하겠네. 일찍 일어나야겠다. 그래도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 뿌듯한 연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산타의 커밍아웃 타이밍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