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역 편의점들은 24시간 문을 열지 않는 곳이 많다. 서울보다 면적이 크지만 전체 인구가 고작 2만 7000여 명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24시간 내내 편의점을 방문할 수요가 거의 없어서다. 1년 365일 문을 연다 해도 저녁 9시 전에 문을 닫는 곳이 많고, 관광객이 유입되는 여름 한철에만 한시적으로 문을 여는 편의점도 있다. 내가 일하는 곳은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해변에 위치한 호텔 1층에 자리 잡고 있어서 관광객이 몰리지 않는 비수기에도 찾는 사람들이 그럭저럭 있다. 그래도 24시간은 아니다. 아침 7시에 문을 열어 밤 11시가 넘으면 문을 닫는다. 난 7시에 가게를 열고 오후 5시까지 10시간을 일한다. 점심시간은 따로 없다. 짬을 내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저녁과 밤은 주인장의 시간이다.
이제 춘분이 되어 낮이 점점 길어질 테지만, 처음 일을 시작한 지난달만 해도 긴 밤으로 인해 일출이 조금 늦게 이루어졌다. 덕분에 가게를 열기 10분 전쯤 일터에 도착하고 나면 곧 해가 떠오르는 걸 목격할 수 있었는데, 수평선 너머로 버얼겋게 떠오르는 태양은 서쪽의 일몰 못지않게 마음을 꿈틀거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그저 저 뜨거운 항성을 중심으로 이 특별한 행성이 공전과 자전을 반복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라는 점을 잊고 본다면, 시야가 가 닿을 수 있는 저 끝에서 피어나는 태양의 움직임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마치 물에서 솟아나는 불덩이 같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예전에 즐겨 듣던 김민기의 노래가 생각난다. “보라 동해의 떠오르는 태양, 누구의 머리 위에 이글거리나.” 어릴 적 난 이 노래에 너무 매료된 나머지,운동장 조회 때마다 부르던 애국가 대신 이 노래가 나라를 대표하는 곡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한때, 김민기의 노래를 참 많이도 들었다. <봉우리>도 그중 하나였다. “바다를 생각해, 바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구.” 봉우리에 오른 적이 있던가.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고갯마루 너머 바다를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하물며, 고갯마루 너머 바다 언저리에서 일하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일출을 뒤로하고 일과를 시작한다. 대개 새로 입고된 상품을 검수하고 진열하는 일로 하루를 연다. 예전 말로 하면, 만물상이 따로 없다. 오래전 ‘○○상회’라는 이름을 곧잘 사용하던 만물상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무언가를 사러 그곳에 갈 때면, 탐나지만 결코 쉬이 손에 넣을 수 없는 온갖 물건들에 홀려 마른침을 삼키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곳에 오는 아이들도 그런 마음을 품고 있을까. 자신 있게 원하는 상품을 골라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고사리손으로 과자 하나를 살포시 내미는 몸짓을 보면 공연히 빙그레 웃게 된다. 아이들 눈을 현혹하는 과장된 포장만큼은 아니겠지만, 아무쪼록 과자가 아이에게 맛있게 느껴졌으면 좋겠다.
상품 검수 및 진열 이후에는 청소와 정리, 유통기한 확인 등 자잘한 후속 작업들이 이어진다. 그리고 대개 이 단계에 들어설 때면 첫 손님이 나타나곤 한다. 물론, 해변에 관광객이 넘쳐나는 한여름에는 문을 열자마자 사람들이 들이닥칠 게 불을 보듯 훤한 일이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래도 며칠 전 주말에는 손님이 제법 많았다. 점점 따뜻해지는 날씨에 나들이를 오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는 게다. 가족, 연인, 친구, 다양한 구성으로 바닷가를 찾는 그이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겠지. 토요일 늦은 오후, 술을 잔뜩 사 간 이들이 생각난다. 두 사람이었는데, 구입하는 술의 양이 만만치 않았다. 소주 여섯 병에 캔맥주 큰 것 열 개. 난 순간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멤버가 더 있으시죠?”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그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말한다. “네, 더 있어요.” “이따가 밤에 술 더 사러 오면 굉장히 놀라시겠는데?” 물론 난 밤 시간에 그이들을 만날 일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한 사람이 더해진, 세 사람이 방문했다. 숙취를 달래기 위해서다. 난 그이들이 서로 친구인 줄 알았다. “파티는 즐거우셨어요?” “네~” “언제 적 친구들이신가요?” “아니에요, 우리 자매예요.” 세 자매. 형제들끼리 바닷가에 놀러 오고, 형제들끼리 파티를 벌이고, 형제들끼리 웃으며 숙취를 달래는 모습. 참 낯선 풍경이라, 난 무심결에 말하고 말았다. “부럽네요.” 내 말을 의례적인 인사라 생각한 그이들은 그저 웃으며 농을 던진다. “저희 술 더 먹을 수 있었는데, 어제 놀라시는 바람에 더 사러 오지 못했어요. 하하.”
가족 손님들이 오면, 무의식적으로, 하지만 습관적으로 그이들을 관찰하곤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삶을 공유하는 이들은 서로 닮는다. 뭐가 못마땅한지 뚱한 표정으로, 건네는 인사에 아무 반응도 없이 들어서는 아이들 뒤에는 (좀 이상한 말이지만) 아이들을 닮은 어른들이 뚱한 표정으로 들어서곤 하고, 환하게 웃으며 화답하는 아이들과 함께 온 부모들은 대개 그들 역시 밝은 표정으로 눈을 맞춘다. 결국 존재를 형성하는 것은, 태양과 달과 강과 바다와 바람과 산과 들과 흙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다. 그것들이, 던져진 존재를, 지금처럼 존재하게 만든다. 세 자매를 둘러싼 그 모든 것들이, 그이들의 태양과 달과 강과 바다와 바람과 산과 들과 흙이, 밝고 경쾌하게 느껴졌다.
닮은 존재들이, 사랑스럽게 닮아서, 저절로 미소 지어지기도 한다. 아주 맑고 따뜻했던 며칠 전과 달리, 한 주 전의 주말은 약한 비가 흩날리는 조금 쌀쌀한 날이었다. 한 엄마가 어린 두 딸과 함께 들어선다. 세 사람은 컵라면을 먹을 모양이다. 밝고 예의 바른 아이들이다. 별것도 아닌 일에 고마움을 표한다. 본래 빨대가 제공되지 않는 음료를 고른 둘째 아이가 말한다. “빨대 주시면 안 돼요?” “음, 빨대가 필요하세요?” “네~” “그럼, 드려야지요. 자, 여기 있어요.” “고맙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큰아이도 내게 눈을 맞추곤, 배꼽 인사를 하며 말한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라면을 가게 안에서 먹을 순 없었다. 그건 이 가게 주인장의 운영 방침이기 때문이다. 이해는 된다.(또한 덕분에 내가 처리해야 할 일도 줄어든 셈이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상품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다는 이유로, 아무렇지 않게 소란을 피우고, 공간을 더럽히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신 주인장은 가게 앞에 여러 개의 목재 테이블을 마련해 두었다. 문제는 그날의 날씨가 쌀쌀했다는 데 있다. 테이블 위로 처마가 있어 비가 들이치지는 않았지만 좀 추웠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어쩔 수가 없네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런 것도 재미지요, 뭐. 얘들아, 재미있겠지?” “네~” 그이들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걸 보니, 마음이 더 쓰인다. 온장고에 있는 아이들용 초코음료를 두 개 꺼내 계산했다. 내 마음대로 그냥 물건을 내어줄 순 없으니까. 야외 테이블로 나가 아이들에게 음료를 건네며 말한다. “아저씨가 안에서 먹으라고 허락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대신 따뜻한 거 선물로 줄게. 라면 맛있게 먹어~” “고맙습니다~” 비 내리는 오후, 바다가 보이는 야외 테이블에서의 라면 파티가 끝나고, 세 모녀가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컵라면 용기를 처리한 그이들이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 엄마가 말한다. “저기, 선생님. 혹시 괜찮으시면 우리 애들하고 사진 한 장 찍어주실 수 있나요? 나중에 애들한테 추억이 될 것 같아서요.” “어머나! 저야 영광이지요. 얘들아, 아저씨하고 사진 찍을 거야?” “네~” 사진을 찍은 아이들이, 그 엄마가 다시 내게 인사를 한다. “고맙습니다.” 가게를 나서는 아이들이 다시 배꼽 인사를 한다. “고맙습니다~”
오래전, 나는 가끔, 사진첩을 들추어보며, 지금의 나보다 젊은 어머니와 어린 세 형제가 ‘정겨웠을지도 모를’ 나날들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아마도,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그런 날들이 있었을 게다. 그리고 난, 그이들이 그날들을 기억하길 바랐다. 하지만 결국 기억하지 못했다. 우린 서로 닮은 존재들이었을까. 우린 서로 사랑스럽게 닮은 존재들이었던 적 있을까. 어쩌면, 기억 너머로, 그렇게 존재했던 날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동쪽 끝 편의점에서, 그렇게, 부질없이, 뜬금없이, 하릴없이, 멀리 간 옛 가족들을 생각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