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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Jun 05. 2023

낡고 닳아 둥둥 떠오른 마음이여,

백사장에 처박힌 마음이여

나이가 들수록 상대의 나이를 가늠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짐작한 것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낸 경우도 있고, 생각한 것보다 그리 나이 든 사람이 아닌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이를 보았을 때, 난 단박에 알아차리고 말았다. 분명 나와 비슷한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라는 걸. 계산대 옆 원두커피 머신을 이용하는 손님이 왔을 때 가게에 다른 손님이 없어 분주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정적이 흐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난 이를 참지 못한 채 이러저러하게 인사 아닌 인사를 건네는 경우가 많다. 그날의 날씨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관광지라는 특성상 어디에서 왔는지, 가족 여행을 온 것인지 등에 이르기까지 ‘스몰 토크’ 수준의 대화를 청하는 것 정도다. 그이는 춘천에서 왔단다.


내게 ‘춘천’이라는 단어는 늘 묘함 떨림과 긴장감을 가져다준다. 그곳에서 초중등학교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고, 그곳은 ‘5월의 내 첫사랑’이 숨 쉬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실 사랑은 아니었을 테지만, 어쨌든 타자를 향한 미묘한 마음 떨림을 처음으로 느꼈으니 사랑이었다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난 10여 년 전, 굉장히 오랜만에 찾은 춘천이 내가 알던 춘천이 아니어서 약간의 상실감을 느꼈다고 말했고, 그이는 나서부터 계속 그곳에서 살아온 탓인지 그다지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 말했다. 이야기는 곧장 오래전 춘천에 대한 일화로 옮겨 갔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을 다 마치기 전 서울로 이사 갈 즈음 춘천에 처음으로 ‘아파트’가 지어진 일, 한림대 병원이 신축되면서 춘천에 처음으로 ‘에스컬레이터’가 생겨난 일 등등. ‘에스컬레이터’ 이야기에 그이가 반색을 한다. “맞아요. 그거 타본다고 친구들하고 놀러 갔었어요.” 맞장구를 쳤다. 나도 그랬다고. 당신도 그 신기한 기계를 구경하러 간 여러 꼬마들 중 하나였다니 반갑다고.


커피잔을 들고 가게 문을 나섰던 그이가 친구들과 함께 다시 들어섰다. 친구들에게도 커피를 사줄 모양이다. “선생님, 여기 커피 두 잔 더 마시려고요.” 편의점을 찾는 이들 중, 가게 점원인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전국 공통 어색하기 짝이 없는 호칭인 ‘사장님’이거나 ‘아저씨’다. ‘선생님’이 경우에 합당한 호칭이든 아니든 조금 놀라웠다. 가게 점원에게 그렇듯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말을 건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동행한 이들이 커피를 들고 먼저 문을 나섰고, 그이는 다른 물건을 사기 위해 좀 더 머무는 동안, 말을 건넨다. 무례한 일인 줄 알면서도, 그이가 떠나기 전에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저기, 선생님도 저와 비슷한 시기에 학교를 다니셨을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없다고, 내가 젊어 보인다고 손사래를 치는 그이에게 서둘러 말하고 말았다. “저는 ○○년 생이예요. 봉의국민학교하고 남춘천중학교를 다녔고요.” 생각할 겨를 없이, 즉각적으로 흠칫 놀라는 표정에서, 그이가 내 또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애써 묻지 않았지만, 그이는 나와 같은 시기에 춘천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이었다. “학교는 겹치지 않네요. 저는 교동국민학교하고 봉의여중 다녔어요. 그런데 봉의여중은 이제 공학으로 바뀌었어요.” 1980년대에 지방 소도시 대학 병원에 처음으로 들어선 에스컬레이터를 타보겠다고 놀러 간 꼬마들 중 하나가 거기 그렇게 서 있다는 사실에 난 우습게도, 그만, 울컥하고 말았고, 더욱 우스꽝스럽게도, 그 속내를 털어놓고 말았다. “아…, 어떡하죠? 괜히 울컥하네….” 하지만, 실없이 눈물방울이 맺히기 전에, 서둘러 감정을 추스른다. 그곳을 떠나온 이후, 어릴 적 친구들과 모두 연락이 끊겼다고 말하는 내게, 그이는 웃으며 말한다.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그이가 돌아간 뒤, 더러워지지도 않은 가게 바닥을 공연히 물걸레질하며, 상념에 사로잡힌다. ‘화’가 살아 있다면, 그렇게 나이 들어 가고 있을까. ‘승’이가 살아 있었다면, 나처럼 나이 들어 갔을까. 물론 ‘승’이는 살아 있지 않지만, ‘화’는 살아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시간 너머, 거기 두고 온 마음. 애써 싹둑 잘라낸 마음. 결국 잃어버려, 다시는 찾지 못한 마음. 마음 잃은 마음이 시간의 강을 건너 둥둥 떠내려갈 적에, 아아, 나는 단 한 번 강기슭에 기대지 못했구나. 아아, 나는 단 한 번 바다에 가 닿지 못했구나. 아아, 나는 다시 강물을 거슬러 오르지 못한 채, 낡고 닳은 시신으로 물 위에 둥둥 떠오르겠구나. 아아, 나는 그렇게 썩어 문드러지겠구나. 가게 문을 열어젖히고, 잠시 바다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곳엔,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뿐, 아득한 수평선은 잡히지 않는구나. 내 시선보다 더 빨리, 더 멀리, 아른거리며 달아나는 수평선이 전한다. 네게 줄 것은 이것뿐.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뿐. 낡고 닳아 둥둥 떠오른 내 마음이, 내 시신이, 바다에 가 닿지 못한 채, 강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 채, 강기슭에 기대지 못한 채,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를 따라 백사장에 처박힌다.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 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_ 기형도, <오래된 書籍>


https://youtu.be/jtzdjl9WM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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