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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Aug 30. 2023

언제쯤, 겨울이 되어, 나를 떨굴까,

간신히, 매달린, 생이여

지난해 불임의 시절을 지나온 감나무에 올해는 주렁주렁 열매가 맺혔다. 허나, 뿌리에서 잎사귀까지  이어지지 못한 생의 기운 탓인지, 여린 가지들에 목매단 감들은 하나둘 추락하고 말았다. 그들의 육신이 썩어 문드러지는 시큼한 냄새가 진동했지만, 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시신을 매장해주어야 하는데, 생각하다가, 그저, 끝이 다 부러져 나간 낡은 싸리빗자루로 쓸어버렸을 뿐이다. 그럼에도, 생이 시큼하게 부패하는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익은 생의 추락이 흘리는 피를 보고 있자니, 생의 가을이 오기 전 죽어버린 형의 시신이, 막 시신이 된 그이의 몸뚱어리가 흘리던 눈물이, 그이의 눈과 귀에서 흘러내리던 핏물이 떠오르는 거였다. 차마 닦아주지 못한 그 핏물은 어느 뿌리에서 길어 올린 것이었을까. 아들아, 네 형은 잘 있느냐.


백수를 바라보던 어미를 잃은, 여든을 눈앞에 둔 아들이 말했다. 난 이제 고아야. 한참 뒤늦게 고아가 된 아들은 누구를 먹이려는지, 올해도 갖가지 생의 흔적들을 밭 한가득 심었지만, 예전처럼 부지런히 밭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른 봄에 어미를 잃은 그이는, 착각일까, 부쩍 늙어 보였다. 마흔, 젊다면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40년 넘는 세월을 굳세게 살아온, 곧 구순을 맞이할 여인이, 백수를 앞두고 무화된 옆집 언니를 보며 불안증에 시달리다가는, 마당 앞을 서성거리다가, 저녁 무렵 집으로 들어서는 내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말한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요 며칠 가슴이 갑갑하네.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던데. 생의 겨울에 고아가 된 남자와 생의 겨울이 끝나는 날을 두려워하는 여자가 말없이 말한다. 더 살고 싶어. 어머니, 당신도 그랬는지요.  할머니가 삼악산 언저리에서 하얀 뼛가루가 될 적에, 당신도 고아 된 심정으로, 기어이 살고 싶었는지요. 아들아, 난 이제 그만 죽고 싶구나.


여름이 끝나감을 알리는 처서 무렵, 약속이라도 한 듯, 다음 삶을 품은 생들이, 이제 막 다음 삶을 낳은 생들이 가게를 찾는다. 열매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뿌리로, 뿌리에서 다시 열매로, 이어진 생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을 생각하다가, 이쪽에도 끝내 끝이 있을 테고, 저쪽에도 끝내 끝이 있을 텐데, 이쪽 끝도 저쪽 끝도 알지 못한 채, 생을 생으로 이으려 하는 생이, 나는 서럽더라. 아기한테 먹일 이유식 좀 자레인지에 데워도 될까요? 그럼요, 안 될 이유가 뭐 있겠어요. 그럼요, 생을 생으로 이어 가려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 하지만 나는, 하릴없이 생을 생으로 이어 가던 나는, 차마 추락하지 못한 채 간신히 매달린 감의 심정으로, 설익은 채 벌어진 내 육신에서 떨어진 씨앗이 저만치서 새로 나는 것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언제쯤 겨울이 되어 나를 떨굴까, 생각했다. 아버지, 당신이 무화되면, 당신들을 목격해야만 했던, 내 생의 숙제도 끝나는 건가요. 아들아, 저기 새로 나는 나무들을 지켜봐야지. 지겹고도 지겨운 생을 목격해야지. 간신히, 매달린 생을, 견뎌내야지.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주어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 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 든다


_  <병>, 《입속의 검은 잎》,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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