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의 전기신호와 연결되어 있을 뿐,
나는 작가가 아니다. 作家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대로, 짓는 일을, 창작하는 일을 업으로 삼거나,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하여 작가로서 나를 소개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어떤 일도 존재하지 않는다. 거듭 말하지만, 작가가 아니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내가 여기서 하는 일이란, 그저, 마음속에서, 뇌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전기신호를 온라인상의 전기신호로 변환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마저도, 전기신호를 온라인 네트워크상에 저장하고 주고받을 수 있는, 놀라운 기술을 구현한, 다른 누군가의, 다른 지적 생명체의 성취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나의 어린 시절, 좀 더 가깝게는 20대 무렵까지는 마음의 전기신호를 옮겨 적는 일이 지금과 다르게 이루어졌다. 전기신호를 내 손으로, 직접, 물리적으로 변환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연필 내지 이와 유사하게 손으로 쥐고 문자를 쓸 수 있는 도구와 문자를 형상화할 수 있는 매체, 즉 종이가 필요했다. 이는 뇌의 전기신호를 온라인의 전기신호로 옮기기 위해 자판을 두드리는 일과 사뭇 다르다. 후자에서 자판은 구체적인 물리적 변환, 구현이라기보다, 두 개의 전기신호 발현 및 저장 장치(뇌와 전자장치)를 잇는 매개체로 작용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생각의 속도만큼, 때로는 생각의 속도보다 빠르게 자판을 두드릴 수 있다. 연필과 종이(편의상 연필과 종이로 한정하자)는 다르다. 이때 손은 전기신호 이동수단인 자판을 두드릴 때와 전혀 다른 역할을 한다. 나는 마음의 전기신호를, 생각의 전기신호를, 뇌의 전기신호를, 신경계를 통해 손으로 보내고, 학습한 문자의 규칙에 따라 연필로 그려 낸다. 문자를 연필로 ‘그려 내는’ 과정을 나는 ‘쓴다’고 말한다. 이는 꽤 지난한 과정이다. 이를 위해 연필을 제대로 쥐고, 글자를 ‘제대로 그려 내기 위한’ 숱한 연습을 해야 하고, 글자 그리기에 어느 정도 숙달되었다고 해도, 그다음 단계로, 생각의 전기신호를 물리적으로 정확하게 구현하는 연습 또한 해야 한다. 후자를 보통, 글짓기 연습, 문장 연습이라고도 한다. 전기신호의 물리적 변환에, 글짓기에, 숙달되지 않은 경우, 계속해서 지우개를 사용해야 하고, 때로는 지우개조차 사용하기 어려워, 기껏 써 내려온 종이를 통째로 찢어버려야 하는 일도 생긴다. 이는 간단히 delete 기능으로, 전자장치의 전기신호를 지워버리는 일과 다르다.
여기까지 전기신호를 전기신호로 변환하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을까. 20분? 원고지 6매 가까이 되는 분량인데, 물리적으로 문자를 그려 내던 방법으로 20분 내에 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쓰는 일 자체가 자판을 두드리는 것보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자판을 두드릴 때와 달리, 생각의 전기신호가 즉각적으로 변환되지 않기 때문에, 생각해 낸 문장의 구조와 논리를 따라가며 쓰기 위해서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인 것이다. 어, 내가 이 문장을 쓰면서 이후에 무슨 말을 전개하려 했던 거지? 문자를 그리다 보면, 생각의 전기신호를 따라가지 못하다 보면, 잊기 쉽다. 따라서, 글의 전체 구조를, 문장의, 단락의 전체 구조를 미리 생각해두지 않으면, 지도를 그려놓지 않으면, 길을 잃기 쉬워지는 것이다. 물론 자판 두드리기, 전기신호 옮기기에서도 이는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 사실이지만, 약간은 다르다. 우선, 앞서 언급했듯이, 뇌의 전기신호를 전자장치의 전기신호로 옮기는 과정이 거의 즉각적이고, 혹여 옮기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더라도 또한 거의 즉각적으로 수정할 수 있어서, 길을 잃을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어떤 의미에서는, 쓰는 일이, 정확히는 생각의 전기신호를 ‘읽을 수 있게’ 옮기는 일이 꽤 쉬워졌다.
전기신호를 옮기는 일이 쉬워졌다고 해서, ‘무형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유형의 문장’으로 변환하는 일 자체가 쉬워졌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그럼에도, 생각을 글로 옮기는 행위 자체에 ‘접근하기는’ 분명 더 쉬워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쓰기 위해 문구점에 들러 내 손에 잘 맞는 펜을 고르고, 펜과 잘 맞는 공책을 고르고, 책상머리에 앉아 생각을 정돈하고, 펜을 손에 쥐고, 문장을 그려 나가는 일은, 말 그대로 ‘생각보다’ 그리 쉽게 실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마침내 펜으로 문자를 그리는 단계에 진입했다 해도, 오래지 않아, 뭘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며 포기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못생긴 자신의 글씨를 탓할지도 모를 일이다. 노트북을 켜고 전기신호를 전기신호로 옮기는 일은 분명 이보다 훨씬 쉽고 간단하다. 못생긴 필체를 탓할 필요도 없고, 자신 없는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알아서 교정해 준다. 분명, 전기신호의 시대는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도 여기서 쉽게 뇌의 전기신호를 문자화된 전기신호로 변환하고 있는 거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작가가 아니다. 마음의 전기신호를 온라인상의 전기신호로 변환해 문자화한 양이 이른바 ‘책’ 한 권 분량을 거뜬히 넘지만, 이는 짓는 일을, 창작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 변환한 것들이 아니다. 그래서 난 늘 나의 글을 ‘일기 같은 글’이라고 말했다. 일기가 꼭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구구절절 설명해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린 시절 글쓰기 연습하듯 이런저런 생각의 단상을 적었던 것도 일기였다면,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일기 쓰기인 셈이다. 그리고 그 일기장에, 또한 어린 시절 ‘소녀’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듯, ‘기억의 콜라주’니, ‘감각의 기억’이니, ‘존재의 우물’이니 이름을 붙인 셈이다. 물론 이 일기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일기이다. 물리적 존재로서 나는 ‘지금 여기’ 있으나, 생각의 편린들은, 뇌의 전기신호들은 웜홀과 블랙홀을 드나들듯, 내 삶의 이곳저곳을 옮겨 다닌다. 그곳은 무척 작은 세상이지만, 때로는 단번에 우주와 연결되기도 한다. 물론 그 우주는 실재하는, 관측 가능한 우주가 아니라, 내 마음속의, 내 뇌의 전기신호가 상상하는 우주이지만 말이다.
하루 12시간, 주 6일의 노동이 이어진 여름날이 끝난 이후, 김상욱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런 이야말로 작가다. 물론 그의 본업은 과학자이지만, 이처럼 계속해서 좋은 과학 저술을 계속해 나간다면 작가로서 면모도 그의 삶 한쪽을 채워 나가게 될 것이다. 오래전, 대중 과학 서적을 많이 내는 출판사에 다닐 적에, 늘 번역서만을 다루면서, 이 땅에도 괜찮은 대중 과학 저술가가 나타나기를 희망했었다. 김상욱을 만나 반갑다. 그이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리와 완전히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하지만, 난 원자에서 시작해 우주로 나아가는, 물리학자의 시선이, 인간을 이해하는 데,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더 많은 깨달음을 준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누구나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삶이란 꿈속의 꿈이라는 말이, 단지 문학적인 비유가 아님을, 삶의 실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가 아닌, 나의 일기는, 그런 생각들을, 내가 나에게 건네는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와 연결되어 있는, 유일한 끈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도, 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