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때문에>는 아름다운 노래다. 그저 폐부 깊은 곳을 찌르는 사랑 노래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곡의 구성과 전개 자체가 ‘사랑하는 마음’의 떨림, 아픔, 슬픔과 공명하기 때문이다. 곡의 시작을 알리는 현악기는 마치 그이와의 첫 만남처럼, 혹은 그이와 주고받은 첫 눈빛이 가져다준 떨림처럼 마음을 뒤흔든다. 곧이어 현악기의 선율 위로 흐르는 관악기는 마음 떨림 뒤에 찾아든 사랑의 본모습, 곧 아픔과 슬픔처럼 가슴속에 커다란 웅덩이를 만든다. 이내 화자가 읊조린다.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 노래의 전반부는 내내 현악기와 관악기가 어우러져 춤을 추는 가운데, 사랑을 맞닥뜨린 누군가가 끝내 감내해야 할 숨막힘의 시간들이 쓸쓸하게 흘러간다. 사랑의 시간들은 숨막히고 쓸쓸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자는 말한다.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제 숨막히는 마음이 발화되고, 곡의 후반부가 시작됨을 알리는 리드기타의 강렬하고도 애절한 연주 뒤로,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와도 같은 드럼이 울린다. 리드기타의 선율과 드럼의 조화는 마치 심장에서 흘러나온 감정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곡의 전반부에서 조용히 숨죽이던 사랑의 마음이 마침내 폭발하는 듯하지만, 곧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커다란 그대를 향해 작아져만 가는 나이기에, 그 무슨 뜻이라 해도 조용히 따르리오. 사랑하는 대상은 나를 압도한다. 작고 보잘것없는 나는 사랑 앞에서 늘 무력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그이는 떠나갔지만, 무력한 나는 그이를 잡지 못한다. 마침내 돌아온 그이와 영원히 헤어지지 않겠다 하지만, 오직 그이만을 사랑하기에 헤어질 수 없다 하지만, 실은 간절한 바람일 뿐이다. 그이를,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에, 아니,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곡의 마지막은 다시 낮게 흐르는 현악기와 관악기의 선율 뒤로, 느린 엇박자의 심장 소리가, 드럼이 울린다. 점점 멈추어가는 심장처럼, 사랑의 마음처럼, 웅장하게 드럼 비트로 마무리되는 곡은, 미완의 사랑, 결코 완성되지 못할 사랑의 마음처럼 처연하다.
<사랑하기 때문에>를 처음 들었을 때, 내 나이는 고작 열여섯이었다. 사랑이 무언지도 알지 못할 나이였다. 실은, 그로부터 40년 조금 못 되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말이다. 물론, 사랑은 허상이다. 종의 재생산을 위한 허상.(개체의 관점에서 보면 사랑과 종의 재상산에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종 전체로 본다면 상당한 연관관계가 있다.) 그럼에도, 그 허상을 붙잡고 흘러가는 것이 삶이기도 하다. 허깨비 같은 삶을 살아내게 만드는 것이, 실은 그 허상이라는 얘기다. 영화 <파이란>의 주인공, 강백란(장백지 분)은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서류상 남편 이강재(최민식 분)를 그리워한다. 그리워하나? 잘 모르겠다. 사실, 난 이 영화가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지 않는다. 강백란이 이강재에게 품은 마음, 고마움, 그리움은 사실 사랑이 아니다. 그러나, 그이는 서류상 남편을 사랑한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것이 그이로 하여금 삶을 살아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여전히 존재해도 된다는, 혹은 존재해야 한다는 이유 내지 근거가 되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지금 이 세계와의 연결감 혹은 소속감이다. 내가 이 세계의 일원이라는 생각을 품을 때, 사람은 여전히 살아 있고 싶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소속감, 연결감을 형성하는 데 가장 강력한 힘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연대감, 사랑(이라는 허상)이다. <파이란>은 사랑 이야기라기보다 어떻게든 살아 있고 싶어 했던 누군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 그 바람 끝에, 삶 끝에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었지만 말이다.
사랑은 결국 완성되지 못한다. 사랑 자체가 허상이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사랑의 완성에 대한 노래가 아니다. 화자는 다시 ‘돌아올 그대 위해’가 아니라 ‘돌아온 그대 위해’라고 말하지만, 실은 그 단정적인 발화 뒤에,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꿈, 결코 오지 못할 사랑의 회복에 대한 부질없는 희망을 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듯 부질없는 희망을 품은 이유에 대해 ‘사랑하기 때문에’라고 말한다. 실은, 그이를 영원히 사랑한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말하는 ‘사랑’이란, 어떤 굳건한 ‘실체’라기보다 ‘믿음의 방식’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사랑이라는 믿음의 방식을 통해, 인간은 이 무의미한 삶을 살아내야 할 이유와 더불어, 이 생을 계속 계승해 나가야 할, 죽음을 연기해 나가야 할 이유를 찾는다. 어쩌면 그런 까닭에 사랑이 결코 완성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이 곧 삶의 완성이라면, 더 살아야 할, 죽음을 연기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럼에도, <사랑하기 때문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노래다. 사랑이 허상이라 하더라도, 사랑하기 때문에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믿음의 방식을 따라 그이를 그리워하며 삶을 살아내기로 한 것일 뿐일지라도, 우리는 또, 계속해서,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하는 대상으로 인해 사랑이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인간에게,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어, 언제든 사랑을 발화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허상을 좇지 않으면 살아 있을 수 없는 존재이기에, 결국 사랑을 해야만 하는 존재하기에.
어제는, 사랑이라는 허상을 따라, 사랑이라는 허상으로 빚어진 삶을 따라 해변을 찾은 욕망의 잔해들을 쓰레기 분리수거장에 부린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사랑하기 때문에>를 들었다. 낮은 구름 아래로 동풍이 불고, 열어둔 차창 밖으로 늘어선 벼들이 춤을 출 적에, 느닷없이 눈에 들어온 송아지 한 마리. 삶을 키우는 일에 무성의한, 혹은 무례한, 누구로 인해, 제 어미와 형제와 자신이 싸놓은 질퍽한 똥무더기 위에 가만히 앉아 있다. 곡은 전반부를 지나 이제 후반부, 강렬한 기타 연주와 드럼 비트로 사랑하는 마음이 발화되는 즈음, 송아지와 눈이 마주친다.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미안하다. 삶이란 이토록 참혹하구나.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사랑이라는 허상도 없이, 하지만, 누구의 온기를 그리워하며, 너는 거기 그렇게, 앉아 있구나. 나도, 네 옆에, 앉아 있고 싶다. 실은, 나도 네 옆에 앉아 있고 싶다는 마음이, 그 서글픔이, 오늘, 이토록 부질없는 말들을 내뱉게 했다. 나는 한동안, 이 노래를 들으면, 결국 사랑해야만 하는 마음이 아니라, 네 두 눈을 기억할 게다. 네 두 눈에, 오늘 만나고 온 아비의 두 눈이 겹친다. 사랑이라는 허상으로 인해 이어진 삶과, 사랑이라는 허상도 없이 주저앉을 네 삶과, 네 옆에 앉아 있고 싶은 내 마음이 겹친다. 미안하다. 삶이란 이토록 참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