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記. 나날의 기록. 기록될 만한 나날을 살지 않는 존재도 일기를 적을 수 있을까. 삶의 외연과 내면이 동어반복되는 일을 견딜 수 있을까. 어제와 내일 사이에 다른 틈이 있다면, 그건 천천히 낡아가는 오늘일 뿐이라는 걸 확인해도 될까. 나날을 쓰는 데도 구태여 서문이 필요할까. 생의 서문은 사랑이었을까 사랑이라 믿은 허깨비였을까, 운명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죽기 전에 생의 후기를 미리 기록해도 될까.
이토록 차가운 심장도 발화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건, 죽은 자들에 대한 이야기거나, 죽을 예정인 생에 대한 이야기겠지. 그러니 마침내 부재하려고 존재하게 된 생의 무의미를 탓하지는 마. 기록되지 않아도 될 나날을 기록한다고 자책하지 마.
나는 쓰인 적 없는 책. 나는 읽힌 적 없는 책. 그러니 혼잣말이라고 해두자. 日記. 나날의, 혼잣말의 기록. 단 한 번도 뿌리와 소통해보지 못한 나뭇잎의 기록. 뿌리에서 떠나 다시 뿌리를 덮어주는 나뭇잎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