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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Dec 08. 2023

빈 상자를 개다가, 빈 마음을 접었어

2023년 12월 7일, 맑은 하늘에 미세먼지, 대설, 4도~11도

빈 상자를 갈무리하다가, 무심코, '엄마'라고 중얼거렸다. 누런 종이 상자를 개다가 탄식하듯 내뱉기에는 무척 부적절한 단어였다. 철들기 전부터 그이를 부를 때마다 그랬듯, '어머니'라고 중얼거렸다면 조금 나았을까. 아무래도, '어머니'에서는, 각진 느낌이 나니까. 각진 어머니가 아니라, 둥근 엄마를 불러서였을까. 둥그스름한 눈에서 동그스름한 방울이 툭, 떨어진다. 겨울이 오고 있다는 얘기다. 어머니는, 왜 하필, 겨울에 나서, 겨울에 죽었는가. 왜 봄꽃이나, 가을꽃이 되지는 못했는가.


하루 종일 '엄마'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 단어에 포근히 안길 수가 없어서, 여전히 각진 '어머니'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각진 어머니가 구겨진 상자처럼 무너져 내리던 시간의 감각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생이 구겨질 때, 뇌가 시간을 잃어갈 때, 간혹 지금으로 돌아온 그이는, 큰아이도, 딸아이도 도통 오지를 않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구겨진 어머니에게, 큰아이는 죽었고, 딸아이는 당신을 미워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저, 형을, 누이를 불러주랴고, 헛된 물음을 던지는 수밖에. 생을 망각한 채 누워 있는 아버지가,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답했듯, 어머니도, 아니라고, 그럴 필요 없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재하는 존재가 내게 질문을 던지면 무어라 답해야 하나. 빈 상자를 정리하다 '엄마'라고 탄식한 이유가 무어냐고 물으면, 무어라 답해야 하나. 잘 모르겠어요, 어머니. 다만, 오늘 어머니가 좋아하던 청하 한 상자가 가게에 들어왔어요. 당신의 장자도 좋아하던 술이지요. 두 모자가 흥에 겨워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채우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흥에 겨웠던 건지, 슬픔에 겨웠던 건지. 어머니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장면을 떠올려봤어요. 냉장고에서 청하를 꺼내, 장자와 술잔을 부딪고는, 취기에 마음을 맡긴 채, 바닷바람을 맞으며 노래를 부르는 어머니를 그려봤어요. 아마도, 당신은, 패티 김의 <초우>를 부르겠지요. '가슴속에 스며드는 고독이 몸부림칠 때, 갈 길 없는 나그네의 꿈은 사라져, 비에 젖어 우네.'


빈 상자가 패티 김의 <초우>를 부르는 순간, 한 가족이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아들인 듯한 중년의 사내가 어머니인 듯한 노년의 여인에게 묻는다. "엄마! 뭐 드실래?"


오늘은 대설. 큰눈 대신, 백두대간을 넘어온 미세먼지가 땅과 물을 뒤덮어서, 생의 시야가 앞으로도, 뒤로도, 잘 보이지 않았어. 빈 상자를 개다가, 빈 마음을 접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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