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본질을 받아들인다는 것
아내가 법륜 스님의 강의를 듣고 나더니 이렇게 말한다. “행복이란 부정적인 마음이 없는 상태래.” 흠, 그래? 뒤이어 아내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런 거라면, 행복한 상태로 있는 시간이 꽤 많지 않을까?” 흠, 그렇단 말이지.
부정적이지 않은 상태를 행복으로 규정하는 것이 난 꽤 마음에 들었다. 행복을 둘러싼 숱한 이야기들이 대체로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을, 난 마뜩잖게 생각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 구조 속에서 행복은 대개 욕망 충족과 결부돼 있었다. 그게 소소한 욕망이든 거대한 욕망이든 간에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행복을 윤리적인 태도나 가치관과 연결시키는 경우도 있다. 행복은 먼 데 있지 않다는 것, 일상을 둘러싼 평범성 속에 행복이 있다는 것, 그러니 매사에 감사하는 겸손한 태도로 사는 것이 곧 행복을 영위하는 길이라는 것. 욕망 충족 패러다임보다는 좀 낫지만, 이 역시 아주 기껍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이 지리멸렬한 삶을, 범사에 감사하는 태도를 견지하며 행복으로 인식하는 것이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저 ‘부정적이지 않은 상태’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아내 말대로, 긍정적일 것도 부정적일 것도 없이, 그저 바삐 살아내고 있을 뿐, 별다른 감정 없이 보내는 시간도 꽤 많이 있을 것이므로, 그런 상태를 행복으로 규정한다면 분명 우리에게는 행복한 상태로 보내는 시간이 적지 않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정말 그런가?
아뿔싸!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문득 내가 아주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감상 아주 소극적이고, 유보적이며, 정적인 것만 같은 상태, 부정적인 마음이 없는 상태, 그건 사실상 상당히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였기 때문이다.
인간 삶을 추동하는 힘의 상당 부분이 무언가 원하는 바(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를 실현하고 획득하는 과정에서 온다고 할 때, 부정성은 그 실현과 획득의 좌절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실현 과정에서의 좌절이든, 아예 실현 과정에 발 딛지조차 못하는 원초적 좌절이든 간에 말이다. 원초적 좌절은 유년기 때부터 시작될 수도 있다. 이때 시작되는 좌절은 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정서적 불안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더 심하게는 학대와 방임에 따른 자아의 파괴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비교적 정상적인 과정으로 성인기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좌절은 경험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삶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을 ‘쾌’라고 규정한다면, 그 좌절은 ‘불쾌’로 경험되고, 이는 자기 인식과 자기를 둘러싼 세계 인식에 있어서 부정성으로 나타난다. 문제는 영원한 실현과 영원한 쾌는 없으며, 어느 순간 반드시 좌절과 불쾌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부정적인 마음이 없는 상태는 무엇인가. 좌절을 경험하지 않은 마음 상태인가. 아니다. 좌절을 경험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좌절을 경험하고도 불쾌하지 않은 상태인가. 아니다. 어찌 안 좋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아내 말처럼, 일상에서 그저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던 어느 순간의 상태를 말하는가. 그걸로는 부족해 보인다. 누군가 내게 “당신의 삶은 행복한가요?”라고 물을 때, 그저 오늘 그다지 부정적인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고 해서 “네 전 행복해요”라고 답할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 대체 뭐지? 삶이란 그런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 실현과 획득의 여정에 좌절이 수반될 수밖에 없음을, 쾌의 끝에 불쾌가 따라올 수밖에 없음을, 삶의 본질이 그런 것임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그렇게 살아낼 수밖에 없는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 부정적인 마음이 없는 상태란 그런 것이었다.
그러니, 부정적인 마음이 없는 상태가 행복이라는 일갈은 사실상 정서와 감정에 대한 것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가 그런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것. 따라서, 만약 내가 부정적인 마음이 없는 상태에 이른다면, 그 경지에 이른다면 “행복하다”고 말하는 대신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다. “난 지금 이렇게 존재해. 이렇게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느껴. 이렇게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