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있게 살고 싶다

2017년에 1989년을 기억하던 그 마음은 이제

by 식목제

지금은 별일 있게 살고 있냐고?


대학 휴학을 하고 군대에 가 있는 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일 때, 난 ‘별일 있게 살고 싶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어느 잡지에 1년 여간 기고하던 연재 글의 마지막 꼭지였다. 그 글을 끝으로 출판사를 나왔다. 문득 예전 자료들을 보다가 이 글이 눈에 띄었다. 난 그 이후로 별일 있게 살아왔을까? 삶의 모양새가 완전히 바뀌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 모양을 부여잡고 있는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그때의 마음을 기억해 본다. 2017년에 쓰인 마음.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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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_ 1989년, 열여덟


아이가 올해 우리 나이로 열여덟, 고등학교 2학년이다. 얼마 전 주민등록증 발급용 사진을 찍고 오는 걸 보며, 다 커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직도 어리광 아닌 어리광을 부리긴 하지만, 아이와 어른의 경계 사이에서 제법 크게 자란 모습을 보여 줄 때마다 이 녀석이 뒤집기를 하고, 걸음마를 하고, 말을 하는 게 마냥 신기하던 그 아이와 같은 사람인지 놀랍게 느껴진다. 하기야 이 아이와 똑같이 처음 두 다리로 서고, 말하기를 익히던 때가 있었던 내가 이제 중년이 된 걸 보면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다. 생각해 보니, 나에게도 열여덟 시절이 있었다. 1989년이다.


1989년은 홍콩의 유명 배우 주윤발이 국내 음료 브랜드와 ‘사랑해요 밀키스’로 유명한 CF를 찍은 해이자 내 누이가 대학에 입학한 해이기도 하다. 주윤발이 한국에서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 것은 1987년 그 유명한 <영웅본색> 시리즈가 개봉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때 어지간한 남자 중고등학생들은 주윤발이 성냥개비를 입에 물던 모습을 흉내 내곤 했고, 화양극장에서 나와 함께 <영웅본색 2>를 봤던 형은 그가 영화 속에서 라이터 불을 입으로 빨아들이던 장면을 재연해 보이기도 했다. 아마 그렇듯 겉멋을 부리던 게 우리 형만은 아니었겠지.


주윤발에게 반한 건 형뿐이 아니었다. 영화를 좋아해 월간지 <스크린>을 매달 구입했던 누이도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누이가 007 시리즈의 로저 무어 이후 그렇게 좋아한 남자 배우는 처음이었다. 주윤발은 <영웅본색 2>가 개봉하던 1988년 장국영과 함께 한국에 방문했는데,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누이는 아버지에게 주윤발의 사인을 받아다 달라고, 그리 해 주지 않으면 대학입학시험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버지는 결국 사인을 받아 왔다. 그 덕분인지 누이는 1989년 입시에 합격했고, 입학하던 해 사귄 애인(지금의 매형)과 함께 ‘사랑해요 밀키스’를 마시며 연애를 할 수 있었다.


사실 1989년의 나에 대해서는 기억날 만한 게 별로 없다. 아침 6시가 되기 전에 일어나 아침 자율학습(을 빙자한 타율학습)을 하러 학교에 갔다가 밤 10시쯤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일상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다만 기억나는 건, 그즈음부터 아버지가 지방에서 혼자 근무하기 시작했다는 것(약 8년 동안 계속됐다), 그로 인해 홀로 남게 된 어머니가 동네 친구들과 술로 외로움을 달래는 일이 잦아졌다는 것, (통신수단이라곤 집 전화와 공중전화가 전부였던 그 시절) 둘 다 애인이 있었던 형과 누이가 집 전화를 두고 거의 매일 신경전을 벌였다는 것, 아무튼 자기 삶이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믿었던 그 세 사람이 번갈아(혹은 동시에) 술을 마시고 들어와 폭언과 눈물로 얼룩진 싸움을 벌이는 일이 많았다는 것 정도다. 그때 나는 그저 말이 없고 무뚝뚝한 아이였다.


# 2 _ 나는 별일 없이 살았지만


나에게는 정말 별일이 없었다. 가족이란 정말 만들 게 못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는 것, 어서 스무 살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 스무 살이 되면 아직 아무 데도 없는 애인을 만나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다는 것 정도가 다였다. 그래도 세상에는 별일이 있었다. ‘사랑해요 밀키스’만이 그해의 전부가 아니었다. 세계적으로는 중국의 천안문 사건과 독일의 베를린 장벽 붕괴가 있었고, 한국에서도 대한항공기 추락과 임수경 평양축전 참가 등 굵직굵직한 사건이 많았다. 아시아나의 취항과 롯데월드의 개장도 이 해에 일어난 일이고, 함석헌 선생의 별세와 기형도 시인의 요절도 같은 해에 일어났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해 12월 31일에 있었던 전두환의 5공 청문회 국회 증언이다. 당시 그는 광주에서 시민을 상대로 한 발포와 관련해 군의 ‘자위권’을 운운해 맹비난을 받았다.(그는 최근에도 자서전을 발간해 518을 왜곡한 바 있다.) 전두환 청문회에서는 또 하나의 유명한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노무현의 명패 투척 사건이다. 당시 이를 두고 분개한 노무현이 전두환을 향해 명패를 던진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는데, 그는 자서전 성격의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설명했다. 전두환에게 던진 게 아니라 당시 통일민주당 지도부에 화가 나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당시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정호용을 희생양으로 삼는 정도에서 광주 특위를 마무리 짓기로 합의했고, 전두환의 발언이 청문회 증언이라기보다 사실상 대국민 연설에 가까웠던 까닭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바로 다음 해인 1990년 1월,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노태우의 민주정의당이 하나로 뭉치는 그 유명한 3당 합당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노무현은 3당 합당을 거부하고 뜻을 같이하는 7명과 함께 이른바 ‘꼬마민주당’을 결성했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났다. 정권이 여섯 번 바뀌는 동안 명패 사건의 노무현이 대통령에 오르기도 했고, 또 이제는 그의 정치적 동지인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간 우리 사회는 무엇이 변화하고 무엇이 변화하지 않았을까. 내 삶은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을까. 또 우리 사회는 무엇을 변화시켜 나가야 하고, 무엇을 지켜 나가야 할까. 나는 무엇을 변화시키고, 무엇을 지켜야 할까.


# 3 _ 별일 있게 살고 싶다


나는 이 사회가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로 넘쳐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 불행감이 너무 깊어 눈물과 갈등만이 넘쳐나지 않기를 바란다. 눈물과 갈등에 지쳐 냉소와 환멸이 넘쳐나지 않기를 바란다. 한쪽에서는 불행한 욕망들이 싸우고, 다른 한쪽에서는 냉담한 비관주의가 공고해지는 세상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시인 황동규는 이성복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발문에서 이렇게 썼다. “이즈음 시를 읽거나 쓸 때, 시란 행복 없이 사는 일의 훈련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건 틀린 생각일 것이다. 시는 행복을 행복답게 노래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행복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이 존재한다면, 끝까지 추적하는 것이 성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황동규가 말한바, ‘행복 없이 사는 일의 훈련’이란 것이 ‘행복할 수 없는 상황을 끝까지 추적’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행복 없이 사는 데 익숙해지고 불행감에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고 싶어 애쓰는 것일 게다. 또한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 시집을 두고 ‘따뜻한 비관주의’라 평한 바 있는데, 행복 없는 삶에 대해 슬퍼하고 절망하되, 그 삶을 연민하고 어루만질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따뜻한 비관주의 아닐까 싶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행복하지 못한 현실을 끝까지 추적해 보려는 성실과 그런 현실 속에서 슬퍼하는 우리 삶을 어루만질 따뜻함 아닐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별일 있게 살고 싶다. 좋은 일 앞에서도, 나쁜 일 앞에서도 ‘사는 게 뭐 그렇지, 별거 있나’ 하며 별일 없이, 별일 없는 듯 살기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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