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나무와 비를 기억하며
# 1 _ 꽃 花
이름에 꽃 花자가 들어가는 그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로 전학을 왔다. 다른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 하나가 사라지면서, 그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이 시내의 여러 학교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이었다. 처음 온 날, 가만히 앉아 동화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후, 난 초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그 아이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그건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그런 정서가 아니었다. 그 아이가 좋아서 말을 건네고, 장난을 걸고, 선물을 하는, 그런 일들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난 그저 방학이 되면, 그 아이에게 편지를 쓰거나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 오는 숙제가 있던 날, 그 숙제를 발표하던 날, 그 아이는 머나먼 중동에서 일하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힘들지만 열심히 일하시는 아버지를 보니, 자신도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커서 아픈 사람을 돕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는 커서 의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어느 대학병원 수술실 간호사가 되어,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 그이가 이루고 싶었던 진짜 꿈은 의사 그 자체가 아니라 아픈 사람을 돕는 것이었으니, 분명 꿈을 이룬 것이었다.
5월 1일 노동절에 태어난 그 아이는, 도드라지지 않는, 조용하고 선한 아이였다. 그런 그 아이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 좋았다. 그 아이에게서 답장을 받는 일이 좋았다. 서울로 떠나올 때 그 아이를 만나지 못하고 온 것이 후회됐다. 서울에 와 그 아이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그 아이와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무슨 이유에선지, 내게, 잃어버린 내 생의 정서와 맞닿아 있는 듯했다. 소식이 끊기면서, 나를 지켜주던 작은 온기가, 끊어진 듯했다.
편지로만 이야기 나누던 나의 친구야, 어디서 무엇으로든 잘 살아가고 있으면 좋겠구나. 나의 소년기는 너와 주고받은 편지로 따뜻했단다.
# 2 _ 심을 植
심을 植자가 들어가는 내 어린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다. 난 서울로 떠나온 후, 녀석이 보고 싶어 방학이 되면 춘천에 가곤 했는데, 거기서 어머님 몰래 맥주를 사다 먹으며 둘이 시시덕거리곤 했다. 옛날식 슬레이트 지붕의 그 낡은 집에서, 그 낡은 집의 방 한구석에서 우리는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추억이 그리워, 난 방학 때면 그곳을 찾았다. 그러면 친구는 아무개가 왔다며 꼭 다른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고, 그러면 그 낡은 방 한구석에 꾸역꾸역 모여 사춘기 남자아이들이 으레 그러듯 시답잖은 농담을 지껄이며 시간을 보냈다.
친구는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유흥주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어느 방학 친구를 만나러 갔을 때, 녀석은 다짜고짜 자기가 일하는 곳이라며 어두침침한 지하 공간으로 날 안내했다. 그리고 그리 넓지 않은 홀 한구석 방 안에서 나오는 어떤 여자아이. 둘은 내겐 낯선 대화를 주고받으며 날 희롱했다. 주춤거리며 땅 위로 올라왔을 때, 오랜만에 오락실이나 같이 갈까,라고 물었는 때, 녀석은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오락실 다니냐?"
이후로, 난 녀석을 만나러 가지 못했다. 스무 살이 넘어, 녀석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난 녀석을 만나러 가지 못했다. 시간이 제법 흐른 뒤, 난 녀석을 만나러 가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녀석의 결혼을 축하해주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녀석과 나누었던 그 작은 온기를 송두리째 끊어버린 것이 후회됐다.
자전거를 타고 이곳저곳 함께 '돌아치던' 나의 친구야. 넌 지금 어디에 심겨, 어떻게 살고 있을까. 부디 커다랗고 튼튼한 나무가 되어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주고 있으면 좋겠구나. 나의 소년기는 너와 보낸 시간으로 따뜻했단다.
# 3 _ 비 雨
어머니, 어머니는 어린 시절이 기억나시는지요. 어린 시절의 친구가 기억나시는지요. 어제는 비가 왔습니다. 비가 와서 좋았습니다. 밭에 심긴 작물들이 목마르다 하여, 비가 오니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작물들 때문만은 아닙니다. 전 어린 시절, 비가 오면, 비를 맞는 게 좋아서, 우산도 없이 길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때론 비 듣는 소리가 좋아 우산을 펴기도 했지만, 그래도 전 흠뻑 젖도록 비를 맞는 게 더 좋았습니다.
어머니, 비가 오니, 비를 맞고 얼굴빛이 돌아온 어린싹들을 보니, 갑자기 어린 시절 친구들이 생각났습니다. 어머니 花와 植이 생각나시는지요. 내가 좋아하던 그 어린 친구들을 기억하시는지요. 어머니, 그 시절이 생각나시는지요. 그 시절, 어머니는 괜찮으셨는지요. 그래도 그때 전, 어머니가 술 한잔에 노래를 부르는 것이 좋았습니다. 오직 그때만 당신의 얼굴엔 그늘이 없었습니다.
어머니, 당신의 벗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전 소식 몰라 어머니께 묻습니다. 아직 이곳에 있나요. 누구는 거기에 있나요. 당신의 벗들과 술 한잔 하고 싶으신가요. 당신은 누구와의 기억이 따뜻하게 남아 있는가요. 전, 당신과 술 한잔 함께하지 못한 게 조금 후회됩니다. 당신이 좋아하던 술 한잔 따라 드리지 못한 게 조금은 후회가 됩니다.
어머니, 비가 내린 어제, 아버지가 울더이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 합니다. 아버지의 꿈 한 곁에 잠시 다녀가시길. 당신이 보고 싶다 합니다. 따뜻한 기억이라곤 당신밖에 없는 듯하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