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머리 앤 Anne with an e
넷플릭스 드라마 <빨간머리 앤>을 보며 남겼던 메모와 짤막한 리뷰를 함께 올린다.
순간이 아닌 시간을 알아봐주는 사람에게 고맙다. 순간과 순간이 모여 만들어진 세계를 기억해주는 사람에게 고맙다. 오래 알아서 좋을 때는 그런 때일 것이다. 가끔 못나고 부족한 모습을 보여도, 저 사람의 시간과 세계를 알기에 이 순간의 모습을 전부로 치부하지 않을 수 있을 때.
앤이 커스버트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마릴라와 매튜가 앤애게 관용과 포용을 보여줄 때마다 그동안 앤애게 그런 것들이 얼마나 필요했을지 떠올리며 울었다. 엄마, 아빠란 말 없이도 가족이 되어가는 세 명의 커스버트와 그들이 사는 초록지붕집이, 아직 오지 않은 2020년의 봄을 대신해주고 있는 3월이다.
예전에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나에게 ‘가족 같다’고 말해주는 걸 들으며 그게 자세히 어떤 의미인지 몰라 참 막연했는데, 이제는 그 말이 얼마나 깊은 사랑을 품고 있었는지 안다. 나의 세계를 기꺼이 알아가 주는 사람. 그래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쉴 곳이 되어주는 사람.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앞으로도 나를 가족처럼 여겨주면 좋겠다. 오래오래 함께하며, 가끔은 싸우고 가끔은 미워해도, 잘못했다고 울며 안기면 서로를 견뎌주면 좋겠다.
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책은 폭풍 속에서 항구가 되어준다고. 요즘 빨간머리앤이 나의 항구다.
2020.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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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를 보며 기억이 났다. 유년기의 나는 빨간머리 앤을 정말 좋아했었다. 그 당시 TV 만화로 앤을 보며, 앤과 나를 동일시하는 동시에 빨간머리를 흩날리며 치마를 입고 뛰어다니는 앤을 부러워했었다.
앤은 마치 팔각형 같은 사람이다. 세상의 어떤 면과 만나도 앤이 가진 각은 세상을 찌른다. 어쩌면 8개보다 훨씬 많은 각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앤의 성격이 모나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쉼 없이 굴러가는 동그란 바퀴보다는 여기저기를 구르다가도 멈춰설 일이 많은 팔각형 바퀴 같은 사람이란 말이다.
그중엔 상처로 인해 튀어나온 각도 있고, 앤이 선천적으로 지니고 태어난 각도 있다. 앤이 가진 것 중 가장 앤 답고, 그래서 가장 특출난 상상력은 앤의 과거를 과거가 될 수 있게 했다. 앤을 버티게 했고, 살게 했다. 그리고 훗날엔 소중한 친구의 삶에도 숨을 불어넣어준다.
그런 앤 셜리가 앤 셜리 커스버트가 되어가는 여정을 보는 게 행복했고, 앤으로 인해 성장해가는 에번리를 보는 게 벅찼다. 다르고 특별해서 미움 받았던 앤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삶과 주변을 다르고 특별한 계절로 채워나간다.
가끔 앤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함께 느끼며 가슴을 부여 잡게될 정도로 가슴이 아팠지만 그 이후엔 나에게 사랑과 청춘에 대해 알게 해줄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서 보는 내내 행복했다.
다만 1800년대의 끝을 살았던 앤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 아직도 세상은 동그란 바퀴만 쉽게 굴러갈 수 있는 곳이라는 게 조금 슬펐다. 세상은 사람보다 늦게 자라는구나. 그래도 그걸 알았으니 나도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에 크게 슬퍼하지 말아야겠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앤과 앤의 모든 사람들은 성장했으니, 나도 세상보다 빨리 어른이 되어야겠다.
"인생이 이렇게 중대해질 수 있다니 누가 알았겠어?
아침은 평소처럼 시작한다고 해도 해 질 녘까지는 영원한 변화를 가져올 일이 생기곤 하잖아."
"세상이 네게 뭘 주는지가 아니라 네가 세상에 뭘 주는지가 중요해."
+)
앤은 자신의 빨간머리를 싫어한다. 빨간머리는 영원히 아름다워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날 앤이 모닥불 근처에서 머리칼을 풀어헤친 채 춤 출 때 앤의 빨간머리는 석양처럼 타올랐고, 앤의 머리카락이 뿜어내는 불빛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사람이 있었다. 앤이 자신의 무엇도 바꾸지 않은 채 사랑하고 사랑 받아서 참 좋았다.
2020.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