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남매의 부모님과 9남매의 자식들
우리 엄마는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2남 7녀. 일곱째 아들이 태어나기 전까지 줄줄이 딸만 낳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여덟째 아들을 낳고 막내딸을 낳은 후에야 이제 자식을 그만 낳아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마 아홉째가 막내딸이 아닌 아홉째 아들이었다면 우리 엄마는 10남매 중 넷째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미 어마어마하게 많은 9명의 자식들 외에도 두 명의 자식이 더 있었단다. 두 자식들은 어린 시절의 연약함을 이기지 못해 내 이모가 되지 못했다.
이 이야기를 비롯한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늘 세상에서 가장 작은 몸을 더 작게 웅크리고 앉아있는 외할머니를 떠올렸다. 할머니가 웅크려 앉아 계실 때면 나는 내 힘만으로도 할머니를 그대로 안아 올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초등학생 이후로 가져본 적이 없는 몸무게를 가진 할머니는 그 작은 몸에 말로 다 못할 세월과 역사를 모두 품은 채 자주 혼잣말을 하셨다.
할머니가 그렇게 작아진 것, 할머니가 11명의 자식을 낳은 것, 할머니가 혼잣말을 하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이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칠순 잔치를 할 때면 사회자에게 영화배우처럼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훤칠한 외모를 지녔던 우리 할아버지. 손주들에겐 그저 조용하고 인자하고 잘 생긴 할아버지였던 할아버지는 당신의 아내와 자식들에겐 참 못할 짓을 많이 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할아버지에게 애틋하지 않았고, 초등학생처럼 작아진 할머니를 어린 아기 돌보듯 어르고 달래며 사랑했다.
평생 술담배도 하지 않았던 건강한 몸으로 오랫동안 할머니를 아프게 하셨던 할아버지는, 치매와 파킨슨병에 걸려 또 오랫동안 앓다 떠나셨다. 살아 생전 아버지에게 애틋한 적이 없었던 딸들이지만, 엄마와 이모들은 아버지라는 이름 앞에 울고 아파했다. 어쩌면 딸들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을 며느리들도, 사위들도 모두 울었다. 그 모습을 지켜봤던 손주들은 모두 할머니가 자유를 조금만이라도 더 누리다가 가실 수 있길 바랐다. 부모라는 이름만으로도 다 큰 자식들을 속절없이 울게 만드는 죽음인데, 이름에 커다란 사랑과 애틋함이 묻어있는 부모의 죽음은 가까운 시일 내에 다가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손주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밥상을 차리고 치우며 손님을 맞이했다. 9남매의 머리에 흰 머리가 피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의 세월이 흘러, 늘 '애들'이라 불리던 손주들은 '애들'이 아니게 되었다. 손주들은 코로나 때문에 예상보다 붐비지 않는 식당의 한 구석에 마스크를 낀 채 모여 앉아 일 할 때를 기다렸다. 상을 치워야 할 테이블이 생기면 다들 한때 알바몬이었던 경력을 뽐내며 너나 할 것 없이 나서서 상 위와 아래까지 착착 정리했다. 불평 한 마디 없이 새벽 두세시까지 식당을 지키다 빈소로 돌아갔을 땐 이미 방 두 개가 모두 사람으로 꽉 차 잠을 잘 자리조차 없었지만 다들 자신의 패딩을 말아서 베개와 이불 삼아 잠을 청했다. 갑자기 새벽에 손님이 찾아와 허겁지겁 일어나면서도 형들은 서둘러 셔츠를 입고 동생을 재웠다. 어른이 된 손주들은 그렇게 어른 노릇을 해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발인을 마치고, 각자의 엄마를 챙기고 이모와 삼촌을 챙기는 손주들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 할머니를 저렇게 작아지게 한 할아버지. 우리 할머니를 쉴 새 없는 혼잣말에 가두신 할아버지. 딸들로부터 애틋한 말 한 마디 우러나오지 않게 만든 아빠였던 할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욕심으로 만든 대가족은, 어찌되었든 이렇게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구나. 너무도 많이 태어나버렸지만, 가족이 된 이상 너무도 많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내가 의지할 언니, 내가 안겨 울 동생의 품, 내가 믿으며 자랄 누나. 9남매는 그렇게 자랐고, 9남매가 만든 가족들은 또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자라고 있었다. 훗날 우리가 겪어야 할 또 다른 상실이 찾아왔을 때도 우린 그때처럼 그 시간들을 견뎌낼 것이다. 가끔은 많이 울고, 가끔은 무너지겠지만, 내 두 다리가 모두 무너져도 그 자리에 대신 서 있어 줄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사람들은 그래서 가족인가보다. 서로 휴대전화 번호를 모를 정도로 교류가 없어도, 만나기만 하면 서로를 위해 잠을 줄여가며 일해주는 사람들. 그 모든 노동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
상실을 겪을 때마다 되뇌는 노래가 있다.
이소라의 <Track 8>이라는 노래엔 이런 가사가 등장한다.
"죽음보다 네가 남긴 전부를 기억할게"
많은 상실 앞에서 떠올리며 나를 위로했던 이 가사를 다시 한 번 떠올린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할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모든 것으로 할아버지를 기억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