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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s Dec 04. 2019

[OB'sDiary]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음악의 이유

https://youtu.be/fr976_FAFs4

Seong-jin Cho - 2018.05.25 RACHMANINOV: Piano Concerto No. 2 (Frankfurt, Germany)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 피아노 : 조성진

- 지휘 : Andrés Orozco Estrada

- 오케스트라 : hr-Sinfonieorchester Orchestra


클래식의 ㅋ도, 피아노의 ㅍ도 모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협주곡이 있다. 바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이 곡을 알게된 계기도 드라마(노다메칸타빌레)였기에, 라흐마니노프에 대해 아는 것 역시 러시아 출신의 피아노 대가라는 것밖에 없었다. 대학생 시절 <서양 음악의 이해>라는 교양 수업을 그렇게 즐겁게 들었음에도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과제 증빙용으로 제출했다가 돌려 받지 못한 나의 첫 오케스트라 공연 관람 프로그램북 뿐이다.


이런 클알못 피알못인 내가 이 곡을 사랑하게 된 계기는, 그저 이 곡이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이 음악이 다음에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했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드라마나 CF 등에서 이 곡을 마주쳤을 때는 연주 장면이 끊기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처음으로 유튜브에 라흐마니노프의 이름을 검색해보고,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유명하디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하나하나 찾아 들었다. 어떻게 치면 이 곡을 잘 치는 건지, '라피협 2번의 대가' 같은 피아니스트가 누구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이 버전은 이래서 좋고, 저 버전은 저래서 좋아서 며칠을 계속 들었다.  


그렇게 라피협 2번을 들으며 과제도 하고, 자소서도 썼다. 온갖 지루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마다 이 곡을 들었다. 왠지 가요나 뮤지컬 음악이 아닌 이 음악만을 들으며 나의 지루하지만 중요한 일들을 완성하고 싶었다. 음악에는 기억이 묻기 마련인데, 이 음악에는 그 당시의 괴롭고 지루했던 기억이 쉬이 묻지 않았다. 언제 이 음악을 떠올려도 그저 황홀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내가 아무리 지루한 일을 하고 있어도 이 음악은 40분 내내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싶어서 다시 한 번 듣고 있는 지금도. 


'슬프다' '음악이 좋다' '아름답다' 같은, 수식어로는 잘 설명이 안 된다. 그래서 내가 이 곡을 왜 이렇게까지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반복하며 들었어도 단 한 번도 지겹지 않았다. 그저 좋아할 뿐, 이유나 수식을 달지 않아서 내게 음악 그 자체로 기억되는 순간이 많아서인가보다. 그저 언제 들어도 전율이다. 


몇 주 전에 조성진이 연주한 영상을 발견했다(상단 링크 첨부). 나는 조성진이 왜 그렇게 대단한지, 피아노를 어떻게 잘 치는 것인지도 역시 전혀 모른다. 하지만 예전부터 그가 연주한 이 곡을 레코딩 버전으로나마 계속 반복해서 들어왔고, 이 영상을 발견했을 때는 정말 진부한 표현이지만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과 같은 기쁨이 이런 감정이라는 걸 실감해버렸다.  


영상을 발견한 이후로 정말 꾸준히 반복재생해오고 있는데, 오늘도 영상을 배경음악처럼 재생시켜놓은 채 할 일을 하다가 문득 이 글이 쓰고 싶어졌다. 이 곡이 내게 주는 감동을 어떻게라도 표현해 놓고 싶어서. 내가 하기 싫지만 해내야 하는 일을 하는 괴로운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준 음악이 가진 것을 기억하고 싶어서. 가사 한 줄 없는, 그저 악기 소리 뿐인 이 머나먼 시대의 음악이 2018년의 내게 건네는 숨낳은 말들을,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이 음악이 내게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찬 느낌을 어떻게라도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아마 동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행운이라 여겨야 할 피아니스트의 정교하고 힘 있는 연주가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도 부족한 방법으로나마 기억하고 싶기도 하고. 정말 나는 그를 평가할 수 있는 아무런 소견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그의 연주를 이렇게 열렬히 사랑하고 있기에. 


이 글을 쓰며 찾아본 바로는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에 상처, 회한, 몸부림 그리고 새 희망을 향한 갈망과 의지를 담았다고 한다. 그 모든 개념들이, 개념을 설명하는 이름 없이 무형으로, 하지만 이름을 가진 유형의 존재보다 더 크게 나에게 와 닿았다. 음악은 그래서 대단한 것 같다. 아무런 단어 없이도 수천 마디의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한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그 작품 자체만으로도 사람에게 음악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한다. 내가 이 곡과 함께 견뎌낸 수많은 시간이 음악의 존재의 이유를 증명한다. 



2018년 6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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