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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s Dec 10. 2019

[OB'sDiay] 집으로

빨간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일에 대하여

삐빅-소리와 함께 지하철 게이트에 숫자가 떴다. 0과 124,580. 월말엔 익숙한 숫자다. 내가 얼마나 서울과 경기도를 뻔질나게 넘나들었는지 알려주는 누적 금액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것도 스펙이라는 말을 실감하며 괜히 억울해진다. 오늘 같은 하루의 끝에선 평소엔 아무렇지 않게 존재하던 사실도 이렇게 억울하게 맺힌다. 지하철 게이트를 나선 후에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저녁 6시 35분. 현재 시간을 확인한 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한다. 출구를 나서면 역시나 족히 200미터는 될 것 같은 긴 줄이 늘어져 있다. 이 줄이 몇 번 줄이냐며 낯선 사람에게 물으며 줄의 꼬리를 쫓아가는 것도 일상이 되었다. 목요일이면 유난히 길어지는 줄의 끝을 겨우 찾아 선 후 새삼스럽게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본다. 좁은 길 위에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의 검은 머리통들.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일 조차도 이렇게 치열하다고 누군가에게 시위라도 하고 싶은 마음을 사진을 찍어두는 걸로 대신하는 거다. 그렇게 더디게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나도 같은 질문을 받는다. ○○번 줄 맞아요? 네 혹은 아니오라는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즉시 발걸음을 옮긴다. 가끔은 나조차도 잊는다. 사소한 도움을 받은 후에 건네는 고맙다는 인사를. 그래서 그들의 무심함에 개의치 않으려 한다. 이 치열한 귀갓길에서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저 빨간 버스에 조금이라도 빨리 오르는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한번에 45명, 많으면 80명 이상까지도 태우고 가는 버스이지만 언제든 내 앞에서 문이 닫힐 수도 있으니까. 


15분쯤 기다렸을까. 다행히 생각보다는 빠르게 내가 탈 수 있는 버스가 도착했다. 15분 동안 적어도 세네 대의 버스가 지나간 덕분이다. 줄은 착착 줄어든다. 버스 옆 전광판에는 20이라는 숫자가 떠 있다. 마음이 편안하다. 가끔 전광판에 뜬 01이라는 숫자를 보고 탔는데 남은 자리가 없을 때의 억울함도 서울에 살지 못하는 억울함과 맞먹기 때문이다. 


여전히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입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있지만 버스 좌석에 앉아 등받이에 편히 기대면 마치 집에 거의 도착한 듯한 안도감이 나를 감싼다. 가끔은 음악도, 스마트폰도 모두 지겨워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모든 좌석이 채워지고 입석까지 꽉 들어차면 버스는 출발한다. 엄청난 무게에 버스가 잠깐 뒤로 쏠리는 것이 느껴진다. 45인승을 개조해 49인승으로 만든 버스이지만 복도까지 사람이 가득 타고 있다. 좌석 줄을 기다리는 시간조차 아깝거나, 시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입석을 택하는 사람들의 사정을 생각하며 아찔해진다. 그야 말로 귀가마저 전쟁이다. 조금 더 시간을 투자해 편안한 귀갓길을 택한 나는 언제나처럼 집 근처에서 눈이 번쩍 뜨이길 기대하며 잠이 든다. 버스는 최소한의 조명만 남기고 소등한 채 고속도로를 달린다. 승객들 역시 최소한의 밝기로 낮춘 스마트폰 불빛과 함께 실려간다. 빨간 불빛과 빨간 버스들로 가득찬 고속도로가 어제처럼 빼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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