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돌아가셔도 눈물 하나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글을 쓰기로 시작한 첫 페이지가 '성폭행' 이라니.
내가 그 범죄자들에게 할 수 있는 건
당신들 덕분에 부스터를 달고서 내 책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
이라는 자기 합리화인 것이다.
요즘에야 그루밍 성범죄, 데이트 폭력, 등등.. 이름이 붙었지만
이름도 붙여지지 않았을 당시에는 그것이 성폭행인지도 몰랐을뿐더러
딱히 부를 수 있는 용어가 없다는 이유로 내가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소리인 줄 알았다.
나는 그렇게 정신과에 다녔다. 벌써 10년째 단골이다.
성폭행을 당하고서 정신과에 가기 시작했나요?
그건 아니였다.
나는 아빠 없이 혼자 사는 엄마에게 남편이자
첫째 딸이자, 친구이자(동등하진 않은)
때로는 엄마를 달래줄 수 있는 엄마가 되어주기도 해야 했기에
너무 많은 역할로 진작 고장 나기 시작했다.
10대와 20대 내내
엄마의 통제와 집착과 하루가 멀다시피 쏟아지는 막말과 욕설로 일찍이 엉망이었다.
처음 정신과는 고3 때 아빠와 방문했는데
결국 터질것이 터진거였다.
당시 엄마는 내게 자아가 생기는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았다.
자신이 하라는것에 이유를 묻거나 의견을 꺼내기만해도, 니 생각은 필요 없고, 내 마음이니 말대꾸 하지말고입을 닫거나 집을 나가라고 했다.
엄마는 인형을 원했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의견을 내세우지 않는.
훗날 그 말도 안되는 억압이 딸의 인생을 어떻게 망치는지 알았어야했는데.
어느날은 내가 아빠를 닮아서 보기 싫다며
아빠에게 전화를 해서 나를 데려가라고 집에서 내쫓았다.
당시 옥탑방에 살던 아빠는 밤에 일을 하러 나가야 했고 난 그 옥탑방에서 혼자 잠들었어야 했는데
아빠는 엄마에게
"내가 멀쩡한 집에 살면 모를까, 고등학생 여자애를 옥탑방에 어떻게 혼자 두고 일을 나가!?"라고 소리쳤지만
엄마는 그래도 나는 싫으니 니가 데리고 있으라며
완강했다.
그렇게 아빠집으로 갔다.
그곳에서도 쫓겨나면 갈 곳이 없을 거란 생각에 아빠 비위를 맞추며 씩씩한 척을 했다.
"와, 아빠 경치가 엄청 좋아요!"부터 시작해서 "와 아빠 저는 여기서 자면 되겠네요! 걱정 마세요"
라는 말을 하며 아빠 눈치를 봤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더럽고 치사한 일이었다.
난 잘못도 없으면서 죄송하단 말을 달고 살았고,
눈치가 백 단이었으며,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으로 자랐다.
아빠란 사람도 날뛰는 엄마옆에서 비교적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을뿐 엄마와 똑같다는 사실을 결혼을 하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내 눈엔 아빠나 엄마나 똑같은 사람이라 결혼한것이다.
그렇게 성인이 되며 학생 때보다는 좀 더 자주
병원에 스스로 찾아갔다.
20대에도 여전히 친구이자, 딸이자, 남편이자, 엄마가 필요한 나의 엄마를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마를 떠날 수 없으니 정신과를 가는 게 최선이었다.
그렇게 내 인생의 괴로움은 '가족'에서 비롯되어
몇 년 후 '성폭행'으로 바통 터치가 되었다.
엄마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할 수 있으니
지금은 몇 년 전
나를 살려준 한 사람에게 먼저 감사의 말을 전해야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범죄로 괴롭기만 한 날들은 아니었다.
감사한 날도 분명히 존재했다.
나의 괴로운 일상에서 성범죄가 원인은 되어주었을지언정, 모든 날이 엉망은 아니었다.
내 일상 속에는 가끔 이벤트도, 사랑도, 즐거움도, 잔잔한 평화도, 위로와 용기도 있었다.
특히나 정신과는 나에게 맞는 곳을 가야 한다.
물론 다른 병원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자신과 에너지가 맞아야 한다.
난 몇몇 병원을 전전했다.
약만 처방해 주고 얼굴도 쳐다보지 않으려는 의사 선생님,
진료 10초 컷인 의사 선생님,
남자에게 안 좋은 기억이 있는데 내가 남자라도 괜찮냐고 웃던 의사 선생님.
(아이러니하게도, 이 선생님은 추후 나의 귀인이 된다. 다음 이야기에서 이어가겠다.)
너무 귀찮고 번거롭고 우울하다 보면 힘이 하나도 없는 날이 많았던지라
한동안 '내가 남자여도 괜찮냐고 웃던 선생님'에게 진료를 받았다.
그렇지만 나를 잘 이해 못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있었는데
가끔은 약만 타오고 괜찮아졌다고 나은 척을 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아픔에 굳이 깊게 들어가지 않으시려는 선생님의 상담방식에 나도 아픔을 말하기가 어색해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트라우마를 다루는 여선생님이 있는 병원을 찾아냈다.
난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고 다섯 번째 진료날
고백했다.
'제가 성폭행을 당했었는데요, 전부 제 잘못인 것 같아서 심하게 자책하고 있어요."
내 이야기를 듣던 당시 주치의 선생님은
나 대신 화를 내며 숨도 안 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군가 걸려들길 바라고 판을 깔고 있는 사람을 이길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거기에 걸려든 사람이 바보가 아니라, 그 판을 짠 사람이 나쁜 사람이죠.
파리지옥 식물 아시죠. 입을 벌리고 있다가 파리가 들어오면 입을 닫아 삼키는.
그 파리가 잘못한 걸까요?
초등학생 아이가 성폭행을 당했다면, 그 아이는 무슨 잘못을 했을까요?
OO님이 만난 사람들은 권위가 있었고
그들은 갑 나는 을의 입장에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그게 맞다고 생각되는 게 아주 당연해요.
권위를 가진 사람의 말은 의심할 수 없거든요.
제가 어떤 프로그램에서 의사 가운을 입혀놓고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얼마나 의심하지 않는지
보이는 것이 권위적인 사람에게 얼마나 따르는지 본 적이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실험이었어요.
의사 가운만 입은 거죠.
'코끼리 코를 잡고 돌아라 검사에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했어요.
아무도 '선생님 이걸 왜 해야 하나요?'
묻지 않고 그런가 보다, 의사가 하라니까 그래야 하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다들 하라는대로 했어요.
제3자가 볼 때는 이상하겠지만
우리는 그 상황에 들어가면
의심할 수 없고 '그게 맞는구나.' 생각해요.
또한 내가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없이
내 옆에서 그게 잘못된 거라고 말해주는 어른이 한 명도 없는 상태로 권위, 권력을 가진 사람이
“이게 맞아.”라고 수십 번 수백 번 말한다면 세뇌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게 맞는 거라고 말이죠.
보이스피싱을 당한 사람들이 잘못한 게 아니라
보이스피싱을 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불안심리를 이용해서 어떤 부분을 건드려야 하는지 알고
그 불안에 휩싸인 사람들은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 상황에서 자유롭게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돼요.
그러니까 아예 그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게 번호를 차단해서 받지 않거나 스팸으로 해놓거나
아예 그 판에 들어가지 않게 만드는 게 피해를 안 당하는 최선의 일이죠.
이미 걸려들고 나서 그 불안함을 조종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을 손가락질할 수 없어요."
시원했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였다.
난 이 날을 잊을 수 없다.
진료실에서도 울었고 집에 돌아와서도 울었다.
분명 희망을 본 눈물이였으리라.
이 날은 너무 더웠고, 병원은 오후 3시 예약이었다.
어디 놀러 갈 곳도 없으면서 사둔 옷들이 있어서, 정신과에 가면서 세상 예쁘게 차려입고 가서는
거울에 비친 스스로가 한심해서 귀걸이도 빼고..급하게 립스틱도 지우고 진료실로 들어갔었다.
우울하다는 말만 반복하다가
오늘은 이렇게 진료실을 떠나면 내가 정말 잘못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털어놨던 것이다.
기대도 없이.
그냥 말이라도 꺼내자 싶어서.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강했던 나는,
이 날을 기점으로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평일 오후 3시에 의사 한 명이 환자 한 명을 살린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효녀라는 가스라이팅에 절여진 나에게
언젠가 엄마가 돌아가셔도 내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런 모녀관계도 있다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