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남자 없이 성공할 수 없다던 인간

성추행 방법도 가지가지.

by 오로지


마음도 몸도 많이 아팠지만

신혼집에서 계속 울고 있을 수는 없었다.


생각해보니 20대 초반의 여자에게 가해지는

묘한 성범죄 들은 너무도 많았다.


가슴과 근접한 위치의 블라우스 단추에

실밥이 튀어나왔다는 이유로

직접 실밥을 잘라주던 나의 스물셋, 첫 직장 대표임원.

내 글씨가 예쁘다며 구두를 벗고 올라가서 칠판 보드에 오늘의 회의 안건을 다 적어달라는 상사.

(난 정장치마를 입고 있었고, 의자 위에 올라가 1시간가량 보드판을 꽉 채워 글씨를 썼는데

그걸 본 옆자리 동료가 네 상사가 이상한 것 같다며 계속 나를 뒤에서 쳐다보기만 했다고 말해줬다.

네 상사는 꼭 와이프를 찾으려고 면접을 본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꼭 이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이건 성적으로 분명 수치스러움을 주는 말인데

웃어넘기는 바람에 대응하지도 못한 기분 나쁜 말들도많았다.


또 다른 회사에서

들었던 말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주옥같은 말이 있다.


'OO 씨, 여자는 절대 혼자 성공할 수 없어. 여자들 자서전? 그거 다 남자가 뒤에서 초반을 잘 닦아줘서 올라간 거야. 그 여자들 남자 도움 받은 건 죄다 빼고 자기들 노력으로 성공한 척 글 쓰는 거라고. 똑똑한 건 거기서 갈리는 거야. 내가 누구에게 몸을 허락할 것인지. 어차피 다 하는 거 똑똑하게 하는 게 현명한 거지. '


무엇을 위해 저런 말을 했을까.

그러니 성공하고 싶다면 그까짓거 별거 아니니

비싸게 굴지 말라고?


난 권력구조에 의한

그루밍 섬범죄가 저런식으로 시작된다는것을

몇년 뒤, 정신과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이후로 누군가의 도움 없이 내 힘으로 일어서려고 열심히 살았다.

당시에는 저 말이 사실일까?

서점의 모든 책을 뒤지며 전투적으로 고민했다.

그러다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한 여자 작가님에게

용기를 내서 이메일을 보냈다.

잊혀지지 않는 저 메세지를 전한것이다.

작가님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기적처럼 날 만나준 여성 작가님은

훗날 나처럼 같은 고민을 하는 여성들에게

지금 내가 당신에게 용기를 주는것처럼

그들에게도 길잡이와 용기가 되어달라고 했다.

아마도 자신이 보기에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거라고 했다.


내가 다닌 회사가 별나고 인복이 없는 것 같다고?

맞을 수도 있지만..

독특한 회사일 것이라 치부해 버리기에는

그 회사는 여의도 중심에 있는 대기업 중에서도 2030이 동경하는 회사였다.


기업이 잘못이겠는가.

어딜 가나 사람이 문제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남자를 혐오하지 않는다.

나는 남자를 좋아한다.

내 동생도 남자고, 우리 아빠도 남자니까.

내가 남자를 싫어할 이유가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데

내가 경험한 많은 남자들이 자꾸 나에게 '자! 마음껏 남자를 혐오해 줘!'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남성이 가진 고유한 남성성을 멋지다고 생각하는여성이다.

여자에게는 남자가 필요한 순간이 있고

남자에게도 여자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큰 회사라고 다 좋을 것이란 환상도 진작에 사라져 갔다.

중소기업이라고 다를까 해서 들어갔지만

그런 불쾌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그렇게 나는 혼자서 일을 시작한다.

1인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작가님과의 약속, 나와의 약속을 지킨것이다.




성범죄가 가정폭력과 같이 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살다 보니 성범죄를 포함한 모든 일은 누구에게나 운이 안 좋으면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어릴 때부터 '조용히 해, 참아, 더러워도 힘없는 네가 참아야지. 네 잘못이야.'

라는 이야기를 매일같이 듣고 자란 가정폭력의 희생양이라면

이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사회생활에서 벌어지는 모든 갈등이

내면에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는 것을 부모는 적어도 알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는 녹록지 않으니까.


다시 돌아와서,

지난 ㅡ성폭행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덮어두고 잊으려고했으나 잊히지 않았다.

온몸이 아파 병원을 다녔다.

억울했다.

만약 내 몸이 회복이 안 될 정도로 아파진다면

내 병의 모든 원인을 성범죄와 연관 짓게 될 것만 같았다.


그게 무서웠다.

끝없는 원망속에서 지금을 살지 못하게 될까봐.


아무래도 영혼이 많이 다친것 같았다.

그 느낌이 내 스스로에게 너무 미안했다.

몸을 다친건 어떻게 해서든 치료를 하겠지만

영혼이 갈기 갈기 찢긴것 같았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내 영혼은..

대체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 방법을 찾고 싶었다.

늘 외치고 싶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 저 사람이 잘못했다고. 저 범죄자를 잡아서 죽여달라고.'


이제 와서 찾아낼 수도 없고

찾아낸다 한들 무엇을 할 수 있겠냐만은

글로 소리 낼 수 있다면 적어도 내게 미안하지 않을 것 같다.

나를 위해 소리 한번 제대로 내본 적 없는 내가

글로 소리를 낼 수 있으니까.


또, 나와 같은 시기를 보낸 사람이 있다면

연령과 상관없이 학대 속에서 생존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내 활자를 빌려 용기를 주고 싶다.


이런 나도 살아가니까. 같이 살아보자고.

괜찮아서만 살아가는 건 아니라고.

사는 데까진 나를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해주고 싶다.


이제 본격적인 자가 치유의 길을 걸어갈 텐데

나는 살기로 결심했으니

모든 글이 성폭행 생존자로만 존재하진 않을 것이다.

모든 성폭행 생존자들이 하루하루 상처만 생각하며 살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고, 용기를 주고 싶기도 하다.

내가 주고 싶은 용기의 형태는

‘하루하루 만들어가는 일상의 힘'이기 때문이다.

화, 금, 토, 일 연재
이전 01화결혼 3개월 차, 성폭행 트라우마가 생생해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