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ve & Take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 그 마음의 가치는 누구에 의해서 정해지는 걸까?
내가 전하는 마음의 크기와 상대가 받아들이는 그 마음이 과연 같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관계’라는 게 무엇인지 다시금 고민하게 된다.
가끔은 이런 상상도 해본다.
내가 누군가에게 ‘100’만큼의 마음을 줬다고 치자.
그게 정성이든, 선물이든, 시간이든, 어떤 형태로든 상관없이 말이다.
나는 내 기준에서 분명히 ‘100’을 다 줬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도 과연 똑같은 크기로 느낄 수 있을까?
마치 환율처럼 내 마음의 100원이 상대에게는 50원으로 평가절하될 수도, 200원으로 평가절상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준 ‘100’을 ‘200’으로 느낄 수도 있다.
내 진심이 특별하게 다가갔거나, 예상보다 더 감동받은 경우일 것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50’ 정도로 밖에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 사람 기준에서는 부족하게 느껴졌거나, 내가 마음을 전한 방식이 기대와는 사뭇 달랐을지도 모를 일이니 까.
내가 진심으로 ‘100’을 줬는데, 상대가 다르게 느꼈다면 나는 정말 ‘100’을 준 걸까? 아니면 상대가 느낀 대로 ‘50’이나 ‘200’이 되어버린 걸까?
이건 마치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같은 철학적 질문과도 닮아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는 ’ 아무도 없는 상황‘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결국 누군가가 사건을 목격하거나, 증거로 인해 관측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질문은 영국 철학자 조지 버클리의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는 명제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아무도 듣지 못하면 ‘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인 것이다.
이는 양자역학의 “관측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해석과도 연결된다.)
관계라는 것이 과연 숫자로 셀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이런 일은 인간관계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벌어진다.
각자 살아온 환경도, 관계를 맺어온 방식도 다르다 보니 같은 행동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는 게 당연하다.
누군가에겐 문자 한 통이 별 것 아닐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같은 문자 한 통이 그 사람의 하루를 바꿀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자기 기준에 갇혀서 ‘나는 분명히 100을 줬는데’ 하며 억울해할 때가 많다.
내 계산법으로 100을 줬는데, 상대가 50으로 느꼈다고 서운해하는 순간부터 상대의 마음은 이미 놓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조금 더 넓게 보면, 마음을 주고받는 일은 일종의 순환과도 같다.
내가 ‘100’을 줬다고 생각하는데, 상대가 ‘200’으로 느꼈다면 그 사람은 고맙고 미안해서 받은 만큼 뭔가를 돌려주고 싶어질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예상치 못한 ‘200’을 받게 되고, 그걸 보며 ‘어라? 이 사람은 왜 이렇게 과하게 반응하지?’라고 당황할 수도, ‘와,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라고 감동할 수도 있다.
반대로 내가 ‘100’을 줬는데 상대가 ‘50’으로밖에 못 느꼈다면, 그 사람은 그 ‘50’에 맞춰 보답하려 할 테고,
나는 왠지 모르게 서운할 수도 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고작 이거야?’라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 입장에선 충분히 정당한 보답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환율 계산을 잘못한 여행객처럼, 서로의 기준이 다르니까 이런 간극은 어떻게든 피할 수 없을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만족의 기준도 모두 다르다.
어떤 사람은 ‘100’을 받고도 너무 행복해하고, 어떤 사람은 똑같이 ‘100’을 받아도 뭔가 허전해한다.
기대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것도 감사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200’을 받고도 만족 못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줘도 채워지지 않는, 마치 블랙홀 같은 사람들.
그래서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마음의 가치는 절대 숫자로만 설명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가치, 상대가 느끼는 가치, 그리고 그 안에서 각자가 느끼는 만족감까지, 전부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관계는 수학 공식이 아니다.
100 + 100 = 200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100 + 100 = 150일 수도 있고, 100 + 100 = 300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보인다.
누가 나에게 진정한 ‘100’을 준 사람인지, 누가 ‘200’처럼 느껴지게 해 준 사람인지, 그리고 사실은 ‘50’만큼만 준 사람이 누구인지.
시간은 참으로 정직해서, 처음엔 헷갈려도 오래 지켜보면 결국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된다.
통장에 100만 원을 넣어준 사람과, “100만 원 줄게”라고 말만 한 사람은 결국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가만 보면, 그런 숫자 놀음이 사실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관계가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이유는 단순히 주고받는 마음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서로의 마음이 진심으로 닿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서로 진심으로 통한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굳이 ‘몇을 줬고, 몇을 받았다’는 걸 따지지 않는다.
마음이 오가는 관계에선 그런 계산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온다.
살다 보면 관계라는 게 점점 어려워진다.
어릴 땐 참 쉬웠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수록 마음을 주고받는 일이 더 복잡해진다.
어릴 땐 “나 너 좋아해”라고 말하면 그냥 좋아하는 사이가 됐지만, 어른이 되면 “나 너 좋아해”라는 말에 “무슨 의도지?”부터 생각하게 된다.
진심과 가식 사이에서 우리는 늘 줄타기를 한다.
내 모습을 오롯이 보여주고 싶지만 상처받을까 봐 두렵고, 그렇다고 가식으로만 관계를 이어가자니 너무 공허하다.
그래서 적당히 가면을 쓰다가도 때로는 용기 내서 진심을 꺼내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관계라는 걸 배워가는 것 같다.
이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진심은 언젠가, 반드시 전해진다는 것. 당장은 상대가 내가 준 ‘100’을 ‘50’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100’이었다는 건 결국 전해진다.
마치 택배가 주소를 찾아 헤매다가도 결국은 제대로 전달되는 것처럼.
누가 진심을 준 사람인지, 누가 그냥 적당히 계산한 사람인지, 시간은 결코 그것을 숨겨주지 않는다.
그러니 굳이 내가 얼마나 줬는지, 상대가 얼마나 돌려줬는지 따지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괜찮다.
그보다 중요한 건, 그 관계에서 서로 얼마나 편안한지, 서로의 마음이 잘 닿았는지, 그리고 함께 있을 때 내가 행복한지, 그거면 충분하다.
관계는 장부 정리가 아니라, 함께 걷는 여행이니까.
우리가 관계 속에서 반드시 찾아야 하는 건 정확한 등가교환이 아니다.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존중하고, 그 안에서 따뜻함을 느끼는 것.
그게 진정 가치 있는 관계 아닐까.
지금 당장은 헷갈리고 복잡해 보여도, 진심만 잃지 않는다면 결국 가장 따뜻한 관계로 이어질 거라 믿는다.
지금은 ‘100’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해도, 진심은 어떻게든 길을 찾아간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지금의 내 마음만 잘 지키면 된다.
관계는 그렇게 조금씩, 한 걸음씩 만들어가는 거니까.
(part 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