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주로 '이기적 유전자', '코스모스' 같은 과학도서나 '총균쇠', '사피엔스' 같은 빅히스토리 서적처럼 의미 있는 정보와 발견을 담아낸 책들을 좋아했고, 소설과 같이 이야기만 있고 의미 있는 정보가 담겨있지 않은 책들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霧津紀行)'이 법학적성시험(LEET) 문제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지문으로만 읽었더니 뒷 이야기가 궁금하여 소설책을 사서 읽어 보았습니다.
무진기행은 처갓집 덕에 벼락출세한 '윤희중'이 전무 승진을 앞두고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 위하여 오랜만에 고향인 무진으로 내려가 잠시 머물면서, 중학 동창 '조씨'와 모교에서 선생으로 있는 후배 '박선생'과 같은 학교 음악선생인 '하인숙'과 어울린 후 하인숙과 서로 마음이 닿았으나, 집으로부터의 연락을 받고 무진을 떠나 집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진기행을 읽고 나서 이 소설이 주는 정보는 무엇인지, 윤희중은 결국 어떻게 되는 것인지 등 궁금증만 남았습니다.
이후 역시나 소설은 유용하지 않고, 별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멀리하였습니다.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김영하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박학다식한 것은 기본이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언변도 뛰어나고, 위트 있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슈를 바라보는 생각이나 관점도 예리하고 날카로웠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인가 찾아보니 '소설가'라고 하였습니다. 평소에 생각하던 소설가의 이미지와 김영하 작가가 알쓸신잡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사뭇 달랐기에 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이 사람에 대하여 더 알기 위해 좋아하지 않는 소설이지만 속는 샘치고 단편소설인 '오직 두사람'을 사서 읽어보았습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재미있게 소설을 읽었습니다.
이후 김영하 작가의 단편소설집을 사서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에 매료되었고, 이후 '빛의 제국', '검은꽃', '작별인사' 등의 장편소설도 도전해 보았습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등장인물에 이입되어 영화보다 더 입체적인 경험을 하고 동시에 슬픔과, 분노와 기쁨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의 즐거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김영하 작가의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주제는 "이야기가 가진 힘과, 우리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였습니다.
(이하에서는 김영하 작가의 강의 일부를 토대로 저만의 관점을 추가하여 각색하였습니다)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의 '사피엔스(Sapiens: A Brief History of Humankind)'는 힘도 약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이 지구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인간만이 상상의 무엇인가를 믿는 능력을 가진 덕분에, 자연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100여명 규모의 집단을 뛰어넘어 수천, 수만 심지어 수억 명의 사람들이 모여 회사, 종교, 국가, 자본주의, 화폐제도 등의 병렬적으로 연결된 대규모 협력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상상의 무엇인가'를 인간은 어떻게 믿을까요?
김영하 작가는 '이야기'를 통해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과 동질성을 느낍니다. 건축가 유현준 교수는 미국에서 유학시절을 보내면서 쉽게 일본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본인이 어릴 때부터 즐겨보던 드래곤볼, 슬램덩크 등의 만화 이야기를 일본으로 유학온 사람들도 어릴 때 즐겨보던 이야기였기 때문에 서로 친근하게 느껴졌고, 좀 더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같은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것은 같은 것을 믿는다는 의미이고, 문화적으로 쉽게 공감할 수 있게 되어 같은 집단에 속해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같은 이야기를 믿음으로써 인간은 대규모 협력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국가들에서 건국신화를 만들어 그 이야기를 퍼트리는 이유였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도움이 되는 정보를 좋아하는 인류와 현재 별다른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인류.
진화적 경쟁에서 소설, 드라마, 영화, 넷플릭스, 뒷담화 등 가릴 것 없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유전자 쪽이 살아남았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생각해 보면 열매가 열리는 곳을 알려주거나, 사냥을 잘하는 법 등의 실용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생존확률이 더 높을 것만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수천 명의 사람들과 수만 가지의 환경들이 어우러져 셀 수 없는 변수들을 만들어내는 복잡계(complex system) 사회입니다. 자기 계발 서적이나 유용한 정보들을 통해서만 살아가기에 이 세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는 것이죠. 복잡하고 다변화된 사회에서 정답만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왜 별 볼 일 없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생존에 유리했을까요?
그것은 이야기가 가진 힘인, 사람들의 불안과 걱정을 해소해 주는 '시뮬레이터'의 역할 덕분입니다. 심리적으로 내·외부의 강한 충격을 받으면 사람은 크게 무너지게 됩니다. 이때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고 실용정보만 접했던 사람들은 이 충격에서 쉽사리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정보는 우리의 감정을 돌봐주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이야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현재 심리적으로 무너진 상황이 과거 접했던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 유사하게 경험해 봤기에 충격을 완화할 수 있고, 이야기를 통한 간접 경험은 마치 백신처럼 위기에 대한 감정의 면역체계를 강화하여 위기를 지헤롭게 헤쳐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든지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는 '고아(孤兒)'와 관련된 것이라고 합니다. 국내외 구분 없이 '신데렐라', '콩쥐팥쥐'와 같은 구전동화부터 '빨간머리앤',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근대의 소설, 그리고 '해리포터', '겨울왕국' 등 현시대를 강타하여 어린이들의 세계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 고아였습니다.
아이들에게 가장 걱정스럽고 두려운 일은 바로 부모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가장 든든한 존재이자, 가장 친한 친구이기 때문이죠. 가장 좋은 것은 그것을 상실할 때 가장 큰 슬픔으로 찾아옵니다. 아이들은 고아 이야기를 통해 등장인물이 되어 고아가 되는 이야기를 체험합니다. 특히, 이야기는 잠시 우리를 다른 세계로 가서 트러블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해리포터는 부모를 잃고 친척에 맡겨진 채 온갖 멸시와 학대를 당하며 계단 밑 벽장에서 힘겹게 살아가지만, 마법학교인 호그와트에 입학하여 론, 헤르미온느 등 친한 친구들과 우정을 쌓고, 세상을 구하는 훌륭한 마법사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은 고아인 해리포터가 되어 그 인물을 체험하고 해리가 역경을 헤치고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불안과 걱정을 날려버립니다. 이러한 간접경험을 통해 아이들은 생각을 확장하고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고아가 됨으로써 고아가 되는 걱정과 불안을 비로소 해소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에 끌린다는 것은 그것이 나의 관심과 두려움이 있다는 것에 대한 방증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가장 큰 두려움인 부모의 상실, 고아 이야기를 통해 고아가 되는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그것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해소하고, 이겨낼 강한 힘을 비축하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등장인물들에 이입함으로써 이야기 자체를 감정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단순한 정보는 금방 우리 머릿속에서 휘발되지만, 기억이 기쁨/화남/슬픔/분노 등의 감정과 결합되는 순간 그 기억은 오래도록 우리의 기억과 감정의 공간에 각인되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정보인 주차위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는 다반사이지만, 주차위치에서 다른 차와 부딪혀 화가 났거나 혹은 그 주차위치에서 연인과 헤어지게 되는 슬픔을 겪는다면 그 주차위치는 평생토록 기억할 것입니다. 이처럼 이야기는 감정과 결합되어 그 안에 담긴 중요한 내용들이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대부분의 것을 이야기로 판단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소통하고 설득할 수 있습니다. 옷, 커피, 위스키 등의 정보를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그 회사나 제품의 역사부터 소개해줍니다. 우리는 그 회사나 제품의 역사로 표현되는 스토리를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등산브랜드 중 '파타고니아'라는 브랜드가 있습니다. 파타고니아는 우리가 옷을 만들기 시작한 이유는 환경을 보호하기 위함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만든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사기보다 수선해서 입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파타고니아는 자신의 브랜드 철학과 역사를 이야기하며 고객과 소통하고 제품판매를 설득하였고, 그 결과 현재 젊은 세대들에게 사랑받는 회사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많은 기업들이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깨닫고 회사와 브랜드 및 제품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끼리 공감하여 대규모 협력 시스템을 만들수 있도록 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시뮬레이터로서, 그리고 사람들이 소통하며 이해하고 설득하는 것을 도와주는 촉진자(Facilitator) 역할을 합니다.
한편, 최근에는 숏폼(Short-form)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틱톡, 유튜브 숏츠 및 인스타그램의 릴스 등의 15초에서 최대 10분을 넘기지 않는 짧은 영상이 대세가 되고 있습니다. '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습니다'의 저자이자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전문의인 정희원 교수는 인간의 뇌는 보상을 원하는데 숏폼의 짧은 자극이 우리의 보상체계를 자극하여 짧고 자극적인 영상만을 원하게 만들어, 영화처럼 긴 영상이나 책과 같이 느린 매체들로부터 뇌가 더 이상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단순히 뇌의 보상체계뿐만 아니라 숏폼은 우리의 삶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김영하 작가는 설명합니다. 우리가 현재의 문제를 생각할 때 인생의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가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인생을 20페이지(20살)의 책이라고 한다면, 19페이지(19살)에 와있는 학생에게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커다란 문제가 될 것이고, 앞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100페이지(100살)의 책이라고 한다면 19페이지에서의 트러블은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81페이지나 남아있기 때문이죠. 대하드라마나, 장편소설에서의 주인공은 트러블을 겪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성장합니다. 그러나, 숏폼의 시대로 넘어가면 사람들은 더 이상 긴 이야기를 접하지 않게 되고,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100페이지가 아니라, 10초라고 여길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현재의 실패나 시련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겠지요.
그러니 숏폼의 시대에 더욱 긴 이야기가 필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많이 하지도 않았고, 특히나 소설과 같은 이야기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거의 접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두세 차례 심리적으로 무너지는 큰 위기를 맞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그 시련에 힘겹고 어려운 시간들을 맨몸으로 버텨내야만 했습니다. 만약 제가 소설 등 다양한 이야기를 경험하였다면 그 이야기로부터 쌓인 힘을 통해 더 현명하고 지혜롭게 위기를 극복했을 것만 같아 못내 아쉬웠습니다.
또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았았으니 타인의 감정을 들여다볼 기회가 적어 타인의 생각을 깊게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설득할 때는 언제나 팩트와 사실에 근거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상대방을 이해하거나 공감하거나 혹은 설득함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팩트와 사실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고,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이야기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소설(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진화생물학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존하였기에 우리는 이야기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우리가 가진 불안과 걱정이 해소되고, 나아가 이야기를 통해 내공이 쌓여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한국어와 영어와 같은 언어(Language)가 아니라 우리는 이야기(Story)를 통해 상대방을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하고 설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쓸데없어 보이는 이야기가 인간에게 가장 유용한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쓸데없다고 여겼던 소설, 영화, 넷플리스 등 이야기를 접하는 시간들을 소중히 여기며 즐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