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Magazin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allflower Nov 12. 2017

WE CAN SPEAK!

그런 세상을 바라며, <아이 캔 스피크>


언어는 권력이다.


 이는 영국이 아닌 우리나라에서도 살아 있는 권력이다. 뉴스에서 쓰이는 말과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나누는 표현, 책에 적혀 있거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단어들은 저마다 권력에 맞게 칠해져 있다. 언어가 갖는 의미 그 자체가 존중되는 단어들은 사실상 몇 개 없다. 예를 들면 '좌파'라던지 '집회', '시위', '노동', '노조' 같은 것이 그 예다. 이것들은 실제 의미와 무관하게 정치적으로 오염된 단어다. 나는 동성애를 찬성하고 친노동 정책을 지향하는 심상정 후보를 '좌클릭'이라고 표현했다가 몰매를 맞은 적이 있다. (그녀는 좌클릭 정도가 아니라 좌좌좌좌좌임에도 말이다.)  지지자들은 내가 자신들을 '좌클릭'이라고 표현한 것을 사과하라고 하더라. 그때 깨달았다. 이 말이 얼마나 부정적으로 오염되어 있는지 말이다.


 오염된 단어가 문제인 것은, 그 오염된 단어를 쓰는 사람들의 순수성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합당하고 정의로운 이야기를 할 지언정, (우리 사회에서) 좌파, 노조 같은 딱지가 붙으면 그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어디에 실리지도, 우리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 내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내 뜻을 관철시킬 수 있다는 뜻이며, 시민으로서의 당당한 요구를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정확히 이 반대다. 나의 목소리가 사회에 들릴 확률이 0%란 뜻이다.



그녀가 영어라는 권력을 획득하는 영화. <아이캔 스피크>



 그러니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사회에 소리라도 쳐보고 싶다면, 그는 일단 권력을 갖고 있는 언어를 획득해야만 한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주인공 나옥분이 이 언어라는 권력을 획득해 나가는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영화의 비유들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 어떤 것들을 대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이제훈이 연기한 박민재는 공무원이다. 절차 지키길 좋아하고 법을 지키지 않는 민원대상자(시민)를 싫어하며, 다른 사람의 일에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 그의 캐릭터는 그의 상사에 의해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지는데 "공무원의 신조는 나대지 말자", "절대 책임지지 않는다"와 같은 말들이 그것이다. 박민재가 대유하고 있는 것은 곧 국가다. 국가 혹은 사회, 공공, 어쨌거나 개인들을 돌볼 의무가 있는 공공의 그 어떤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들은 옥분을 유난스럽게 취급하고, 그녀의 말에 무관심하다. (소오름)


애원하는 그녀와 무관심해보이는 국가(공무원).

 

옥분은 위안부 생존자다. 그녀는 시대에 의해 가장 크게 상처를 입은 사람이기에 누구보다 국가와 사회에 이 빚을 갚으라 재촉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진 않는다. 그녀의 성격은 곳곳에서 등장하는데, 왜 이렇게 민원을 넣어가며 오지랖을 부리냐는 말에 "나 좋자고 하냐, 모두 다 같이 살아야 하니까 그런거다." 라고 대답하기도 하고, 상가 입주민들을 쫓아내려는 악덕 상가 주인에게 대항하기 위해 혼자서라도 증거물들을 모아오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말은 사람들에게 오염된 채로 닿는다. 한 상가 입주민은 "어디 하나 건수라도 잡아보려고 신고하는 할머니"라며 소리 지르고, 공무집행방해를 하는 '억지'가 된다. 그녀의 언어에는 권력이 없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떨까. 민재의 동생 영재, 시장 사람들, 진주 슈퍼의 주인 진주댁 등은 우리다. 이 일을 바라보고, 이 일에 관심을 갖고, 이 일을 방관하고 있는 우리들이다. 이 사람들이 영화 후반부에 옥분에게 힘을 실어주기 전까지, 옥분은 평생을 외롭게 혼자 지내게 된다. 이는 위안부 생존자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다뤄지는 대다수의 사건에도 들어맞는 이야기다.




아이 캔 스피크, If together

  "쌀밥 얻어먹으려고 자발적으로 들어간 게 아니냐는 소리를 듣고 정심이가 영어를 배웠어." 옥분의 친구이자 또 다른 위안부 생존자인 정심은 본인들의 언어가 왜곡되는 것을 보고 언어를 획득하기로 결심한다. 옥분 역시 그렇다. 증언에 열심이었던 정심이 병으로 몸져 눕게 되자, 더 이상 이 경험들이 왜곡되는 것이 싫어 연설에 나선다. 드디어 그녀의 말을 통해 그녀의 뜻을 관철하고, 사회에 요구하기 위한 '말'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언어는 스스로 획득되지 않는다. 박민재가 대유하는 국가가 귀 기울이고, 나머지 사람들로 대유되는 다른 시민들이 관심을 가질 때 비로소 그 언어에는 권력이 생긴다. 아마 수년 간 옥분이 혼자서 영어 공부를 했음에도(언어를 획득했음에도) 결과가 썩 좋지 않다가, 민재에게 영어 과외를 받으면서(사회로부터 관심을 받게 되면서) 할 말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되는 영화의 흐름도 이러한 것을 반영한 게 아닌가 싶다.


 "긴 세월을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진주댁의 말에 옥분이 아이처럼 펑펑 우는 것은 이렇듯 무관심했던 사람들과의 화해이리라.


슈퍼 주인 진주댁(시민), 나옥분(당사자), 그리고 국가(공무원..)




아직 들리지 않는 이야기들에 관하여

 옥분은 성공한다. 그녀는 미 의회에서 성공적으로 증언을 하고, 미 의회는 단 두 명만이 반대하는 압도적 표결 차이로 121 결의안을 채택한다. 국제 사회가 일본의 위안부를 인정한 첫 사례다. 물론 그 후 10년 째 일본은 사과하지 않고 있다.


옥분의 증언.


 감독이 의도한 옥분이라는 캐릭터는 위안부 생존자에만 머물지 모르겠지만, 나는 영화를 보며 묻히고 있는 다른 이야기들이 많이 떠올랐다. 특히나 아무리 말을 해도 국가와 사회로부터 외면 받는 문제들, 그 문제를 지적하면 유난스러운 사람이 되어버리는 문제들 말이다. 그리고 나는 대다수의 여성 문제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강남역 살인 사건 후 강남역에 붙은 포스트잇은 이를 정확히 보여준다. 국가와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일반'적인 일이라고 보는 사람들과,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라는 '예외'로 보는 사람들이 너무나 극명하게 대립했다. 왜일까. '소수'의 문제에서 '우리 사회' 문제로 확장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여전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한동안 우리 사회 문제로 확장되기란 어려울 것이다. 사회적 죽음이 정치적 죽음으로 환원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대중'의 힘이 실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옥분이 당당하게 외치던 "I CAN SPEAK!" 라는 말이, 하루라도 더 빠르게 다른 누군가의 입에서도 나올 수 있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범자들>이 두려운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