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에 근무하다보면 국민의 혈세가 이렇게 쓰여도 되나 싶은 상황들을 왕왕 목도한다. 예산 낭비인지 효용이 있는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고, 작게 보면 낭비 같아도 장기적으로 필요한 일인 경우도 있으니 일일이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진짜 아닌 건 아닌 거다.
금액의 크고 작음을 떠나 내가 목격한 최악의 예산 낭비 행정은 ‘미혼남녀 커플 맺어주기’ 행사였다. 세상에나 네상에나. 21세기가 도래하고도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뀐 대명천지에 ‘미혼남녀 커플 맺어주기’라니.
행사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대상은 25세에서 40세 사이의(나이 갭 무엇) 건강한 ‘미혼남녀’. ‘결혼경력’이 없는 진짜 ‘미혼’인지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혼인관계증명서’를 제출해야 함. 주말에 지역의 관광지에 ‘미혼남녀’ 15커플을 쌍쌍이 모아 놓고 ‘인연 찾기 미팅행사 및 커플 맺기’를 진행한다. ‘러브 로테이션’ ‘숲속 데이트’ ‘러브 서바이벌’ 등등……. 저기, 지금 2010년대 맞아요?
보도자료가 나오고, ‘부서장 추천 하에 참가 독려’라는 내용의 공문까지 별도로 내려왔다. 당시 우리 사무실에서 미혼인 사람은 28살이었던 나와 35세였던 옆 팀 남자 직원뿐이었다. 나이 많은 주사님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참가를 독려했으나 옆 팀 주사님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웃어 넘겼고, 나 역시 취향에 안 맞는 자리에 나가고 싶지 않아 사양했다.
그렇게 지나가나 했더니, 행사를 하루 남겨놓고 주관 부서인 주민복지과에서 전화가 왔다. 여성 참가자가 5명 모자라다는 거였다. (일단 10명을 어떻게 모집했는지가 궁금했지만) 담당자는 애가 달았다. 애가 둘인 40대 여직원의 근황까지 물어 가며(“OO씨는 결혼 했어?”) 참가자를 물색했고, 결국 내가 끌려 나갈 상황이 됐다.
인연은 어디서 만날지 모른다는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편이지만, 황금 같은 토요일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행사에 끌려다니며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남자 직원들을 떼로 만날 것도 불편했다. 나 대신 지인을 추천하고 빠지려고 했는데 건너 건너 인맥까지 동원해도 도무지 나가고 싶다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래도 방법이 없자 나는 선 보러 가야 된다는 되도 않는 뻥을 치고 도망치듯 퇴근해버렸다.
결국 행사는 여성이 몇 명 부족한 채로 진행됐다. 보도자료와 함께 나온 사진을 보니, 친구 등을 떠밀어 내보냈으면 우정에 금이 갈 뻔 했다. 누가 봐도 ‘부서장 추천 하에 참가 독려’되어 끌려나온 것이 표정에 역력히 드러나는 사람들이 형식적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보도자료에 의하면, 이날 행사를 통해 무려 8커플이 탄생했다고 한다.(!)
도대체 관공서에서 예산 써 가며 ‘집단 소개팅’을 개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게 다 ‘저출산 대책’이란다. 저출산 문제가 워낙 심각하다보니 지자체별로 저출산 관련 예산이 배정되었고, 그것으로 추진하는 시책이라는 것이다.
아하? ‘건강한’ 미혼남녀를 모집해 집단 짝짓기를 시킨다. → 혼인율, 출산율 증대. 이런 인과관계?
관공서에서 주관하는 사업들이 항상 젊은 여성의 감수성에 맞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로서 이건 좀 심했다. 몇 년 전 크리스마스에 여의도에서 펼쳐진 ‘솔로대첩’이 떠올랐다. 크리스마스에 외로운 솔로들이 모여 짝을 찾아보자는 취지로, 행사 콘셉트가 재미있어 화제는 되었으나 그야말로 웃음거리에 그치고 말았다. 부푼 마음을 갖고 참여한 남성에 비해 여성 수가 턱도 없이 적어서 대실패한 것이다.
이런 식의 커플 매칭 행사가 실패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연애라는 섬세한 감정을 촉발시키기에 알맞지 않은, 일방적이고 남성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미혼남녀 커플 맺어주기’ 행사에 대해서 주변 지인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남성들은 어느 정도 흥미로워하기도 했으나 여성들은 전부 나와 같이 손사래를 쳤다.(‘러브 로테이션’이 웬 말인가요.)
진짜 혼인율, 출산율을 높이는 방법은 따로 있다. 우선 불필요한 회식, 야근, 주말 근무가 사라져야 한다. 데이트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 결혼 과정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에서 거품이 빠져야 한다. 돈 없으면 결혼도 못 하는 세상이다.
무엇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싶게 만들어 줘야 한다. 결혼한 선배가 행복해 보여야 한다. 아이 키우는 일은 물론 힘들지만, 최소한 괴롭지는 않아 보여야 한다. 여섯 시만 되면 지친 어깨로 ‘두 번째 출근’을 하는 선배를 보며 어느 여성이 아이를 낳고 싶을까? 집에 일찍 가면 애들에게 시달린다며, 있지도 않은 회식을 만들고 사무실에서 TV 보며 퇴근을 늦추는 선배를 보면 누가 결혼을 하고 싶을까?
비혼, 딩크가 괜히 유행하는 게 아니다. 결혼과 출산이, 할 수 없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가 아니라 인생의 행복한 과정이 될 수 있게 지원하고, 가족친화적인 직장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일단, 저출산 문제를 집단 소개팅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발상부터 집어치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