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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두맘 Nov 08. 2019

‘기레기’는 이런 사람들이다

기자와 공무원

나는 대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했고, 언론 계통에 종사하는 친구, 지인들이 많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언론 현실에 대해서 비교적 이해도가 높은 편이다. 구독자는 줄고, 수익 구조는 마땅치 않고, 박봉과 격무에 시달리는 기자들은 제대로 된 보도를 하기 어렵고…….


하지만 아무리 이것저것 감안하고 양해한다 해도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관공서에 출입하는 지역 언론 이야기다.




공보실에서 근무하다보니 지역 언론사 관계자와 기자들을 접할 일이 잦았다. 중앙지 기자들은 도청으로 출입하고, 시청에는 지역지 기자들이 주로 드나들었다.


지역지의 가장 큰 문제는, 우선 기사를 제대로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대부분은 보도자료 그대로 기사를 낸다. 팩트 체크는커녕 오타까지 그대로 복붙해서 나가는 경우도 많다. 여러 신문을 한 자리에 놓고 비교해 보면 바이라인만 다르고 내용은 똑같은 기사들이 수두룩하다.


실제로 내 친구 하나가 지역 일간지에서 2년 가까이 근무했는데, 그 회사는 상황이 유독 심각했다. 항상 보도자료 갈무리 수준에서 일을 하다 보니 제대로 된 취재와 기사쓰기 실무를 배우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언론사에 근무했다는 경력을 인정받아 다른 매체로 이직을 했는데, 기본적인 문장의 주술 관계조차 맞게 쓰지 못하는 지경이라 본인을 포함한 여러 사람을 고생시켰다.


(그렇다면 기자가 기사를 안 쓰고 뭘 하느냐? 하면, 기자실 소파에 드러누워 낮잠을 잔다. 거짓말 같은가? 정말이다. 나도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컴퓨터 게임을 하는 기자도 봤다.)




기자가 직접 광고 영업을 하는 것도 문제다. 정상적인 언론사라면 경영과 보도가 분리되어, 기자가 광고주의 눈치를 보지 않고 기사를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재정 여건이 열악한 군소 지역지에서는 기자가 직접 광고를 따러 다니는 일도 심심치 않다. 하루는 기자실에서 브리핑을 듣고 기사를 쓰다가, 그 다음날은 공보실을 찾아와 광고 게재를 요청하는 식이다. 광고주인 공공기관을 비판하는 기사를 제대로 쓸 수 있을 리 없다. 반대로, 광고를 달라며 협박성 기사를 쓰는 경우도 있다.


맡겨놓은 돈 찾아가듯, 시민의 혈세를 광고비로 받아가는 일은 양반이다. 기사와도 광고와도 무관한 수익 사업에 후원을 요구하는 일도 잦다. 그 과정에서 공무원 개개인의 주머니 쌈짓돈이 털리기도 한다.


지역 언론사의 대표적인 수익 사업은 마라톤 행사 개최다. 시청에서는 관행적으로 공무원들이 마라톤 참가 신청을 하고 참가비를 내 왔다. 특히 공보실 직원은 전부 참가하는 것이 기본이고, 타 부서에서는 할당된 인원만큼 참가비를 걷게 되어 있다. 광고비처럼 따로 예산이 잡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적게는 1만원에서 많게는 3만원까지 되는 참가비를 사비에서 갹출해야 한다. 당연히 직원들의 원성이 높고, 김영란법에도 저촉될 소지가 있으나, 언론사 눈치 보기 바쁜 공공기관인지라 도무지 개선이 되지 않고 있다.


임용된 지 얼마 안 되어, 마라톤 참가 신청 명부가 돌았다. 나는 별 고민 없이 마라톤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가 ‘눈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어차피 우리 사무실에서 마라톤에 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꾸역꾸역 참가비만 내고 있는 거였다. 경조사 때 내는 ‘부조금’ 개념이라는 설명도 들었다.


대학 시절 언론학과 수업에서는, 언론과 취재원의 관계는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불가근 불가원’이 되어야 한다고 배웠다. 왜 내가 친하지도, 친해지고 싶지도 않은 언론사를 위해 부조금을 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언론사가 한두 곳이 아니라는 것 또한 문제였다. 독자적인 언론관도 논조도 없는 베껴 쓰기 매체가 난립하는 게 지역 언론의 현실이었고, 그들 각각이 마라톤을 개최하고 참가비를 걷어 갔다. 그야말로 깡패한테 삥 뜯기는 기분이었다.




그나마 김영란법이 생겨서 상황이 나아진 거라고 했다. 김영란법 이전에는 기자들의 요구도 더 당당했고, 공무원 입장에서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점심식사만 해도 그렇다. 주요 브리핑 때마다 간담회니 오찬이니 하는 명목으로 기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한다. 공식적인 오찬이 없을 때도, 점심시간 무렵에 기자들이 사무실 주위를 얼쩡거리고 있으면 으레 실장님이 모시고 나가 점심을 산다. 김영란법 이전에는 아예 부서별로 순번이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매일 브리핑이 끝나면 해당 부서 직원들이 기자님들을 모시고 가서 점심식사를 대접했던 거다. 매일.


저녁에는 기자들의 술상무 노릇도 해야 한다. 술 좋아하는 몇몇 기자들이 퇴근 무렵 사무실에 나타난다. 보도팀을 중심으로 눈치껏 술자리가 마련된다. 술값은 물론 공무원이 낸다. 비용 처리가 매번 되는 건 아니라 팀장님이나 실장님이 사비로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지금은 어쩌다 한 번이고, 김영란법 이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자리가 이어졌다고 한다.


술값 몇 푼은 문제도 안 된다. 가기 싫은 술자리에 끌려 다니며 스트레스 받고 몸 상하는 게 더 심각하다. K 팀장님이 돌아가신 것도, 이 지긋지긋한 술자리 접대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K 팀장님은 김영란법이 생기기 이전 공보실에 오래 근무하신 분이다. 공보실 근무 중 간암을 얻어 휴직을 하셨다가 다행히 병세가 나아져 복직을 하게 됐다. 복직 이후에는 조직의 배려로 비교적 한가한 교외 유적지로 발령받았다.


원체 일에 열정이 많은 분이라, 자리만 지키면 되는 유적지에서도 놀고만 있지 않았다. 유적지 곳곳에 꽃을 심고 가꾸어 포토존을 만들고,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하는 문화 장터를 열어 딱딱한 유적지 이미지를 타파했다. 항상 웃는 낯으로 직원들과 관람객을 대하던, 따뜻한 분이었다.


지금 그 유적지는 팀장님이 뿌린 씨가 꽃을 피워 지역의 인기 관광지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한 번 찾아온 간암은 쉬이 완치되지 않았다. 지난해 간암이 재발한 팀장님은 50대 초의 아까운 나이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새삼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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