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혼남녀 커플 맺어주기 행사만큼은 아니지만 내가 싫어했던 것 중 하나가 회식이다. 공무원 생활을 하는 내내 1차는 저녁식사와 술, 2차는 노래방과 술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직장의 회식 코스를 경험했다. 회식을 직장 생활의 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회식이란 ‘꼰대 문화의 결정체’였다.
원론적으로 따져서 회식은 평소 직장 생활의 못 다한 회포를 풀고 직원들 간에 팀워크를 다지는 기회다. 하지만 현실의 회식은 윗분의 ‘한 말씀’과 형식적으로 이어지는 건배사, 술잔 돌리기, 먼저 가려고 하는 사람 붙잡아 못 가게 하기, 술 안 먹는다는 사람 괴롭히기, 취중진담인 척 무례한 이야기 늘어놓기, 노래방 2차, 술잔 파도타기, 여직원들에게 블루스 추자고 덤비기, 당구장 3차…… 같은 것들로 점철돼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빠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1차 끝나고 집에 갈 수 있을까 궁리하기 바빴다.
우선, 술잔 돌리는 문화가 싫었다. 공무원이 되기 전에 나는 ‘술잔을 돌린다’는 말뜻 자체를 몰랐다. 손목 스냅을 이용해 손 안에 든 술잔을 360도 돌린다는 뜻인가? 술잔을 테이블 위에 굴리나? 술잔 돌리는 광경을 본 적도 없었고, 그게 뭔지 궁금해 해본 적도 없었다.
공무원이 되어 참석한 첫 회식에서 나는 술잔 돌리는 법을 배웠다. 술잔 돌리기란 자신이 마시던 술잔(소주잔)을 상대에게 주고 그 잔에 술을 따라주는 거였다.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저 사람에게서 또 다른 사람으로 술잔이 돌고 돈다. 내게 도착한 술잔이 원래 누구 것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이런 식으로 정을 나누는 거라고 하던데, 그 전에 간염 바이러스를 나누게 되지 않을까요?
비위생적인 것을 다들 알긴 아는지, 술잔 닦는 법도 같이 가르쳐주었다. 술잔을 휴지로 닦기도 하고, 아예 뒤집어서 물컵에 집어넣어 씻기도 한다. 아니 근데, 더러운 거 알면 그냥 안 하면 안 될까요?
돌아다니면서 술 한 잔씩 올려야 하는 윗분 모시기 문화도 싫었다. 솔직히 말해 ‘요즘 애들다운’ 생각으로는 그냥 자기 잔에 자기 페이스로 자기가 알아서 따라 마셨으면 좋겠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회식 자리인 만큼 서로 잔을 채워주는 일 정도는 정으로 할 수 있다. 하지만 돌아다니면서 윗분들 잔에 술을 따라 드리면서 눈도장 찍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왠지 비굴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으면, 사회생활 못하는 눈치 없는 애가 된다. 꼭 누군가 옆구리를 찌른다. 마지못해 실장님 잔이 비기를 기다려 소주병을 들고 찾아가 냉큼 한 잔을 ‘올리고’ 나면 의무방어전을 끝냈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눈앞의 고기를 마구 집어먹었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회식=술자리’라는 공식 자체에 적폐가 있다. 꼴사납게 취해서 제 몸 못 가누는 상사를 보는 것처럼 민망한 일도 없다. 저녁 회식을 하지 말고, 점심시간을 활용해 술 없이 끝내면 어떨까?
실제로 서울의 대기업이나 조직문화가 젊은 회사에서는 이미 점심 회식을 하고 있다. 먼 나라 얘기긴 하지만, 유럽이나 북미의 경우 회식을 근무의 연장으로 보아 초과근무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따라서 점심 회식, 혹은 근무시간 중에 간단히 맥주를 마시는 해피아워 형태로 저녁 회식을 대체한다.
점심 회식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거나하게 술잔을 돌리고 서로 추한 꼴도 좀 보이고 하면서 동료애를 다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네, 다음 꼰대. (실제로 나는 사무실 사람들에게 점심 회식의 장점을 설파하다가 ‘별난 아이’라는 눈총을 받은 적이 있다. 지방 공무원 세계가 이렇다.)
술 마시는 저녁 회식은 퇴근 이후 가족과 함께 해야 하는 개인 시간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누군가를 소외시킨다는 점에서 나쁘다. 내가 이 점을 깨달은 건 우리 사무실의 한 여직원이 임신 중에 회식에 빠지는 걸 보면서였다.
평소 술을 즐기고 회식도 싫어하지는 않는 듯 보이던 주사님이었는데 임신을 하니 술자리에 낄 수 없는 건 당연했다. 회식이라는 자리가 팀워크를 다지며 맛있는 것 먹고 술은 곁들이는 수준이라면 모를까, 부어라 마셔라, 너는 술을 왜 안 마시니, 에이 괜찮아 한 잔 해, 자 건배사가 있겠습니다, 같은 분위기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모임의 콘텐츠가 오로지 ‘음주’인 것이다.
과거만큼 술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해도, 술잔을 돌리고, 파도를 타고, 원샷을 외치는 분위기 속에 술 못 마시는 사람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분위기 깨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며 깍두기처럼 앉아 있어야 한다.
술 못 마시는 사람은 못 마셔서 힘들고, 술 잘 마시는 사람도 즐겁게 마실 수 없어서 힘든 회식. 언제까지 이런 회식을 계속해야 할까? 사회생활 디폴트가 술 실력인 시대는 이제 지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