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페셔널한 직업인이 되고 싶다
공무원이 되고 나서 편리해진 건 직업을 말할 때였다. 프리랜서 작가 시절에는 작가예요, 에서 자기소개가 끝나는 일이 드물었다. 어머 작가님이세요, 어떤 글 써요? 등등 신기해하며 되물어오는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작가도 워낙 다양하니까 묻는 것도 당연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작가란 곧 소설가를 의미하는지 소설은 안 써요? 라는 질문도 종종 받았다.
어쩌다 몇 권의 책을 내고 작가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계속 글 쓰는 일로 먹고 살 수 있을지는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대개 다른 일을 병행하곤 했기 때문에, 나도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가끔 헷갈렸다. 설명하기도 번거롭고 해서, 대충 ‘직장 다닌다’고 둘러대기도 했다.
심플하게 ‘공무원’이라고 직업을 밝힐 수 있게 되니 편했다. 공무원이에요, 그뿐이었다. 어떤 업무 하세요? 라는 질문을 받는 일은 드물었다. 농담처럼 부럽다는 말을 건네거나, 행정에 대한 불만 섞인 하소연을 털어놓을 때도 있었지만(저에게 말씀하시는 것보다 국민신문고에 글 쓰시는 게 빠를 거예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공무원인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작가는 결과물인 글로써 평가받는다. 그와 달리 공무원은 맡은 업무보다는 안정적인 신분이 주는 의미가 훨씬 크다.
공무원도 사실은 작가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갈래가 다양하다. 동사무소에서 등본을 떼어 주는 사람, 주차 지도를 하는 사람, 지역의 상하수도를 관리하는 사람, 공공도서관에 근무하는 사서가 모두 공무원이다. 보건소에 근무하는 의사나 관공서의 송사 업무를 담당하는 변호사 같은 전문직 공무원도 있다. 나처럼 글쓰기 업무를 맡고 있는 공무원도 있고 사진과 영상을 담당하는 전담 공무원도 있다. 규모가 큰 지자체에서는 팟캐스트와 유튜브 등 자체 방송을 운영하기 위해 아나운서를 채용하는 경우도 있다. 국공립학교 교사와 경찰, 소방관도 사실 전부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이다.
한 번은 지역 행사에 취재를 갔다가 미국인 참가자와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는데, 내 직업을 영어로 어떻게 소개할지 고민이 됐다. 한국식으로 공무원이라고 하자면 ‘퍼블릭 서번트public servant’라는 표현이 있지만 영어로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공무원’은 신분을 말하는 것이지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의 일을 하는지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엔지니어도 마케터도 ‘회사원’이지만 왠지 엔지니어나 마케터라고 한다. 방송 기자나 아나운서도 따지고 보면 소속된 ‘회사’가 있지만 ‘회사원’이라고는 잘 표현하지 않는다.
나는 내 직업을 ‘스피치 라이터speech writer’라고 소개했다. 시청에서 시장님의 연설문을 쓰는 작가예요. 길게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공무원이에요, 하고 말 때보다 내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궁금해진 참에 마침 서유럽 한 국가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친구에게 그의 직업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물어봤다. 역시나 ‘공무원이에요’보다는 ‘내무부에서 일하는 IT 매니저에요’라는 식으로, 자신의 신분보다는 직무를 중심으로 표현한다고 했다.
구체적인 업무의 성격을 부각하기보다 그저 ‘공무원’이라는 신분으로 퉁쳐서 말하는 건 그만큼 그 신분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리라. 업무 자체는 순환보직 때문에 주기적으로 바뀌어버린다. 나처럼 특정 업무를 전담하는 임기제 공무원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일반 호봉제 공무원은 보통 2년을 주기로 자리를 옮긴다. 본인이 어느 부서로 가게 될지는 인사 발표가 나는 당일이 돼야 알 수 있다. 원하는 부서로 전보 신청을 하기도 하고 인사팀과 사전에 조율을 할 때도 있지만 짐작조차 못하고 갑자기 옮겨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세무 업무를 담당하던 사람이 갑자기 장애인 복지 업무를 맡게 될 수 있고, 일자리 창출 관련 업무를 하던 사람이 소나무 재선충 방재를 담당하는 부서로 발령이 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주 바뀌는 업무의 내용보다는 확실하게 보장되는 공무원이라는 신분 자체로 직업을 인식하게 되는 것 같다.
유럽에서는 어떤지 물어봤더니, 우리나라와는 달리 직종에 따른 선발을 하기 때문에 비교적 일정한 범위 내의 업무를 맡는다고 했다. 자신의 전공과 적성을 살리고 전문성도 키울 수 있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공직 사회에도 점차 직렬 세분화, 희망보직 제도 등 개인의 적성을 살릴 수 있는 방향의 개편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도 공무원은 공무원일 뿐이다.
공무원도 프로가 될 수 있을까? 국어사전이 정의하는 프로란 ‘어떤 일을 전문으로 하거나 그런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공무원이 전문가가 될 수 있을까? 단순히 연차가 쌓이고 호봉이 올라가는 것을 넘어서, 프로페셔널한 직업인으로서 작게나마 자기 분야를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 인사이동이 이루어질 때마다 처음 해보는 업무에 허둥대다가 겨우 손에 익을 즈음 또다시 발령 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열정을 가지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잘 하는 일을 오랫동안 맡아 하면서 전문성을 쌓을 수는 없는 걸까? 해당 분야에서 전문가로 인정받고 사기업의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이직도 할 수 있을까? 세상은 무섭도록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정년 보장되는 공무원이 되었다고 해서 이대로 안주해도 괜찮은 걸까?
‘철밥통’ 공무원보다 ‘프로’ 공무원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이익은 모두 시민에게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