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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두맘 Nov 17. 2019

그럼에도 공무원이 되고 싶다면

깨어지는 달걀에도 의미가 있다

“공무원을 그만두었습니다”라고 말하면 대부분 눈이 휘둥그레진다. 요즘처럼 어려운 때, 그 좋은 직장을, 왜?

물론 쉽게 그만둔 건 아니었다. 서울도 아니고 지방에서 이만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다른 직장을 다니다 공무원 시험을 쳐서 들어오는 사람은 많아도 공무원을 하다가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사람은 드물었다.


사직서를 내밀자, 화들짝 놀란 팀장님은 “그만두고 뭐 할 건데?” 물으셨다. 지방 소도시에서 공무원을 그만두고 그보다 나은 직장을 얻을 수 있나.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다. 나 역시 이직을 염두에 둔 퇴직은 아니었다. 그냥 빨리 이곳을 탈출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비합리적인 의사 결정 과정. 갑갑한 상명하복 질서와 꼰대스러운 조직문화. 하급자에게 일을 미루는 ‘업무 몰아주기’ 관행. 열심히 하는 사람만 바보 되는 상황들. 뭐든지 대충대충 하는 문화. 잦은 인사이동으로 인해 늘 어수선한 사무실 분위기. 일과 생활의 구분을 어렵게 하는 당직과 비상근무. 비효율적인 시스템. 공무원으로서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 지방 소도시 특유의 폐쇄성까지. 모든 것이 내 등을 떠밀고 있었다.


그나마 내가 2년 가까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상사 복이 있었기 때문이다. 직장인들이 퇴사를 결심하는 상황 중 하나가 ‘롤모델이 보이지 않을 때’라고 한다. 고개를 들고 누가 내 롤모델이 될 수 있을지, 사무실 내 면면을 살펴보자. 꼰대. 그저 사람만 좋은 무능력자. 책임회피형 팀장.


성취동기가 강하고 뭐든지 제대로 하려고 하는 내 성격상 공무원 조직에서 롤모델을 찾기는 어려웠는데, 유일하게 배우고 싶었던 분이 1년 동안 모신 실장님이었다. 업무 능력은 물론 리더십이 뛰어나고 합리적인 분이었다. 내 능력을 알아보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도 많이 해 주셔서, 실장님이 계신 동안은 기운차게 공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사발령으로 실장님이 떠나시고 나니, 더 이상 이 사무실에 남아 있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이 자리에서 몇 년 더 버텼을 때 내 모습은 어떻게 변해갈까? 꼰대? 그저 사람만 좋은 무능력자? 책임회피형 팀장?




공무원은 분명 장점도 많은 직업이다. 우선, 채용 과정이 공정하다. 많은 수험생들이 공무원에 도전하는 이유다. 나이, 성별, 출신 지역, 학벌에 상관없이 오로지 시험 점수로만 줄을 세운다. 나이가 많아서 혹은 적어서, 여자라서, 특정 지역 출신이라서, 지방대를 나와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수많은 차별을 경험하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공무원시험은 하나의 동아줄과도 같다.

공무원은 채용 과정뿐만 아니라 근무성적평정 방식, 직장 복지까지 모든 것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대부분이 공무원법과 그 시행령에 규정되어 있다. 공공기관이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법을 지키고, 법률 위반이 있다면 행정소송으로 따져 물을 수 있다(공무원이 되기 전 프리랜서였던 내게 이는 대단히 와 닿는 변화였다. 아직까지도 계약서 없이 전화 한 통으로 일이 진행되고, 카톡 한 통으로 엎어지는 일이 수두룩한 세상이다). 월급날이 언제인지, 연가는 며칠이나 부여되는지도 다 법에 나와 있다. 살뜰히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어도 대부분 혼자서 검색해 알아낼 수 있었다.


근무처가 공공기관이기 때문에, 정부의 의지가 가장 먼저 영향을 미친다는 것 또한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최신 제도가 가장 먼저 도입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일과 가정의 양립, 저출생과 관련한 대책으로 남성 육아 휴직이 장려되고, 세 자녀를 출산하면 승진 가산점을 주기도 한다. 우리 사무실에서도 육아 휴직을 쓴 남성 직원이 있었다. 특별히 눈치 주는 사람도, 결재 과정에서의 트러블도 없었다. 아직도 회식자리에서 술잔을 돌리는 보수적인 조직인 것을 감안하면 법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다(술잔 돌리기도 국민건강보건을 위해 법으로 금지했으면 좋겠다).


한국 사회에서 아이 키우며 직장생활 하기에는 공무원만 한 직업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3년간의 육아휴직이 법으로 보장된다. 일부 사기업처럼 눈치를 줘서 퇴직하게 만들거나, 육아휴직 쓰고 왔더니 책상이 빠졌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조직의 경우 직장 어린이집이 있어서 자녀와 함께 출퇴근할 수도 있다. 자녀의 졸업식이나 학부모 상담이 필요한 날에는 자녀돌봄휴가도 쓸 수 있고, 연가 사용이나 정시 퇴근도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회식도, 사무실 분위기에 따라서는 거의 안 하거나 1차로 끝나는 곳도 있다고 들었다(부럽다!).


공직은 기본적으로는 보수적인 꼰대 조직이지만, 여성 공직자 수가 많아지고 여러 가지 제도적 완충이 이루어지면서 남초 대기업에 비해서는 한결 누그러져 있다.




성취 욕구가 크지 않고, 남다른 도전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소소하게 만족하면서 다닐 수 있는 게 공직이다. 사회에 봉사하겠다는 마인드가 있는 사람이면 더욱 좋다.


나는 성취욕구가 큰 성격이고, 도전정신도 있는 편이다. 반복적인 업무에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고,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꼰대 문화 속에서 고통 받던 하루하루가 지속되던 어느 날, 사무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는 상상을 했다. 그날 바로 사표를 제출했다.


의원면직(공무원이 자신의 의사에 따라 퇴직하는 것을 의원면직이라고 한다) 후 6개월이 지났다. 부모님이 너무나 좋아하셨던 번듯한 직장, 결코 밀리지 않았던 월급은 때로 아쉽다. 하지만 나 자신으로 살고 있는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다. 남편과 함께 자영업을 해서 생계를 해결하고, 살림도 하면서 쓰고 싶은 글을 쓴다.


공무원 생활을 했던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프리랜서 작가에서 지방공무원까지, 마치 직업체험 극과 극 같은 경험이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조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게 됐고, 무조건 공무원만 욕할 게 아니라는 것도 이해하게 됐다. 무엇보다, 월급 받아 대출금 갚고 결혼 자금도 모았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시간이었다. 어, 어리네? 여직원 책상이 왜 이리 더럽나? 너네가 언제 법대로 했냐! 차별과 편견, 갑질은 견고했다. 보수적인 조직문화와 꼰대들은 견고한 벽 같았고, 공직의 꿈에 부풀었던 신규 공무원은 계란처럼 파사삭 깨어졌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 조직에 미친 영향이 아주 조금쯤은 있다고 생각한다. 왜 여직원 책상이 더 깨끗해야 하죠? 질문을 던짐으로써. 갑작스레 잡히는 회식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제도상으로는 존재하나 아무도 쓰지 않던 대체휴무를 사용함으로써. 바위를 부수지는 못해도 얼룩쯤은 남겼겠지.


깨어지는 달걀에도 의미가 있다. 달걀에는 달걀의 역할이 있다. 달걀의 삶을 살고 있는 모두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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