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고를 낼 뻔했던 내 인생 최악의 마감
마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소설 작가가 원고를 작성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건 아마 영화 미저리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미저리의 주인공은 글을 완성하면 담배 한 대를 핀다. 나에게 마감이란 책상에 앉아 글을 완성하곤 담배 연기를 날리듯 후련하게 털고 자리를 일어나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글쓰기 스터디를 하며 한 달에 한 편의 단편소설을 써보니 마감을 앞둔 나는 영화 미저리의 주인공이 아닌 영화 샤이닝의 주인공이었다. 영화 샤이닝의 주인공은 글을 쓰다가 미쳐버리는 데 이런 명대사를 남긴다.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
영화 속 가장 유명한 장면은 잭 니콜슨이 부서진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모습이다. 하지만 나에겐 저 장면이 가장 강렬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난 뒤부터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될 것이 무서워서 일을 하지 않고 놀기만 했다. 미룰 때까지 미루다가 마감이 닥쳐서야만 글을 쓰게 된 것이다.(그럴싸한 핑계가 아닌가) 근데 <마감 일기>를 읽고 소설 마감 이외에도 여러 종류의 마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에서는 소설가뿐만 아니라 변역 작가, 광고회사 디렉터, 일러스트레이터의 마감에 관한 에세이가 나온다. 그걸 읽고 나의 가장 힘들었던 마감을 생각하다 보니 방송을 했던 때가 떠올랐다.
데일리 방송은 일이 힘들기로 유명한 방송국에서도 악명 높은 프로그램이다. 촬영과 편집을 매일 같이 해야 하고, 하루라도 펑크가 나면 방송사고라는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진다. 그래서 방송이 송출되는 저녁 9시 전까지는 매일 전쟁터 속에서 일을 했다. 한 번은 방송시간까지 편집을 끝내지 못할 뻔했던 적이 있었다. PD로 입봉 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평소엔 10분 내외의 VCR을 편집했는데, 그날은 4분짜리 VCR 두 개를 맡았다. 완성본이 두 개라는 부담감이 있지만 분량으로 따지면 평소보다 적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침에 가편을 끝내고 선배들과 카페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던 중이었다. VCR1의 담당 작가가 총시간을 6분으로 맞춰야 한다고 연락이 왔다. 그럼 VCR2가 2분대로 나가겠거니 하고 커피를 마저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VCR2의 담당 작가에게 RT(영상 길이)가 6분 30초라는 문자를 받고 바로 편집실로 뛰어가야만 했다. 그러니까 VCR 두 개를 편집해야 하는 데 총길이가 12분 30초라는 거였다. 프리미어 CC2020은 두 개의 프로젝트가 한 번에 열려서 동시에 두 가지의 영상을 편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 회사 컴퓨터에 깔려있는 건 프리미어 CS5로 하나의 프로젝트 밖에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VCR1을 편집하다 VCR2를 편집하려면 프로그램을 끄고 다시 켜야 했다. 내레이션을 영상에 얹는 것도 두 번, 자막을 올리는 것도 두 번 모든 일이 두배였다. 그래도 간신히 방송 한 시간 전인 8시에 편집을 마쳤지만 기가 있는 대로 빨려 버렸다.
매일 마감을 하든 한 달에 한번 마감을 하듯 데드라인은 언제나 마음을 졸이게 한다. 그래서 마감 일기 첫 장의 권여선 작가가 쓴 “마감을 사랑하세요!”라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읽어보니 권여선 작가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권여선 작가는 등단을 한 후에도 소설과는 다른 일을 하며 살다가 7년 만에 청탁을 받고 마감이 있는 글을 쓰게 되었다고 말했다. 마감은 고되고 힘든 일임이 분명하지만 등단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그런 비슷한 제도에서 프로의 세계로 넘어간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작업의 단계이기도 하다. 혼자 작업을 한다면 마감이라는 시간을 무한으로 연기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일을 취미가 아닌 전문적으로 하고 싶은 사람으로서 마감이 있는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이 왔을 때 비로소 마감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