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니까 학교에 가지 말아야지

눈이 오는 날 생명을 잃을 뻔한 나의 트라우마

by 월터

고등학교 시절 내가 결석을 한 유일한 이유는 눈 때문이었다. 눈이 오면 도보 10분 거리의 등굣길은 길이 늘어나기라도 하는지 30분이나 걸렸다. 게다가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미끄러져서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게 거의 10회 정도. 무사히 학교에 도착해도 온몸에 힘을 주고 걸은 터라 근육통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 우리 학교의 교문은 6미터 정도 되는 약 45도의 언덕 위에 있었다. 길이 얼면 학생이고 선생님이고 할 것 없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가는 언덕이었다.


여느 날과 같이 눈이 와서 지각을 했다. 정문에는 아무도 없었고 눈도 어느 정도 치워져 있었다. 방심하고 언덕을 오르는데 언덕 중간쯤의 녹은 눈이 다시 얼어서 빙판길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 발을 딛는 순간 깨달았다. 한 발이라도 더 움직이는 순간 바로 고꾸라질 일만 남았다는 것을. 그렇다고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가면 앞으로 기울어진 상체로 중심이 쏠리며 앞으로 넘어지기 딱 좋았다. 그래서 다리에 힘을 주고 스케이트 보드를 타듯이 양팔을 펼쳐서 중심을 잡아 버텼다. 잠시 그렇게 버티다가 힘이 빠져서 어떻게 넘어지는 게 가장 덜 아플까 고민하던 순간 반대쪽에서 구세주가 등장했다. 나의 생명의 은인이 될 사람은 같은 반 친구 A였다. 우산을 쓰고 여유롭게 교문을 향해 걸어가던 친구에게 소리쳤다.


"살려줘!!!"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나와 달리 나와 눈이 마주친 A는 웃음이 터진 채로 조심스럽게 언덕을 내려왔다. A는 쓰고 있던 우산을 접어 끝을 나에게 건넸고 나는 온 힘을 다해서 그 우산을 잡았다. 그때의 심정은 해와 달에서 나오는 남매에게 내려진 동아줄, 신데렐라의 황금마차, 혹부리 영감의 혹을 때어간 도깨비를 본 것 같았다.


그 후로 나는 겨울에 비나 눈이 오면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집에만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사실 막상 넘어지면 그렇게 아프지도 않고 흙탕물이 아닌 이상 툭툭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지만 가장 싫은 건 넘어지기 직전이었다. 하체는 미끄러져서 앞이든 뒤로든 밀려있고, 상체는 이상하게 꺾여 순식간에 몸이 ㄱ 혹은 ㄴ자가 되었다. 차라리 순식간에 넘어지면 마음이 편하련만 넘어지기 직전의 공포는 엄청났다.


이런 트라우마가 있는 나에게 이번 겨울은 유난히 힘들었다. 눈이 끝없이 내리는 날에 출근이라니. 학생이었으면 온갖 핑계를 대고서 학교에 가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회사는 달랐다. 비교적 연차를 사용하는 게 자유로운 회사이지만 당일 연차를 쓰려면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눈이 와서 넘어질 까 봐 연차 사용합니다.
급하신 용무는 전화 주세요.
감사합니다."


라고 적어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가기 싫은 걸 꾹 참고 회사에 출근을 해서 눈이 내리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을 수 있었다. 실내에서 내리는 눈을 보는 건 좋지만 올해는 눈이 그만 왔으면 좋겠다. 제발.


눈 오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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