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카드 없이 사진을 찍는 이유

보지 않을 사진으로 핸드폰 용량이 다 차 버린 당신에게

by 월터

야생동물을 찍으려고 10시간을 넘게 기다린 사람이 결국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그는 카메라가 아닌 두 눈으로 저 멀리 살아 움직이는 야생동물을 담았다. 눈썹이 하얗게 변하고 콧등은 화상을 입어 벌겋게 변했지만 그에게 사진 한 장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본 사람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할 것이다.


위 이야기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일부다. 영화 속 주인공 월터는 잡지 <라이프>의 마지막 호의 표지 사진을 찾기 위해 사진기사 숀 코넬을 찾아간다. 월터는 상어가 있는 바다에 뛰어들고, 날아가는 헬리콥터에 타고, 스케이트 보드로 도로 위를 달리는 등의 평범한 일상과 전혀 다른 일들을 경험한다. 숀코넬을 만난 월터는 집에 두고 온 지갑에 마지막 사진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 숀코넬이 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리던 야생동물이 나온다. 숀코넬이 사진을 찍지 않고 보고만 있자 월터가 묻는다.


"언제 찍을 거예요?"

"어떤 때는 안 찍어"

"아름다운 순간을 보면 카메라로 날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물고 싶지."

"순간 속에 머문다고요?"

"응 그래. 바로 저기. 그리고 여기."


고등학교 1학년 용돈을 모아서 필름 카메라(캐논 AE-1)를 샀다. 그때는 집마다 똑딱이 카메라는 물론, 보급형 DSLR에 스마트폰까지 나온 시절로 이미 필름이란 건 옛날 물건이었다. 하지만 내가 DSLR 대신 필름 카메라를 선택한 이유는 지식인에 올라온 글 때문이었다.


사진작가가 되려면 필름 카메라를 사세요.


사진작가가 꿈이었던 나는 사진을 공부하겠다면서 필름 카메라를 구매했다. 핸드폰으로 찍어도 될 걸 꼭 무거운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 손쉽게 찍어 메모리 카드에 있는 파일을 옮기면 되는 카메라들과 달리 필름 카메라는 이것저것 불편한 것이 많았다. 일단 사진이 잘 찍히고 있는 지도 필름 한통을 다 써야만 확인할 수 있고, 그마저도 필름 뚜껑을 실수로 열어 버리면 확인 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찌나 무거운지 지금 내가 거북목이 된 게 필름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녀서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꽃이 필 때, 운동회, 수학여행 등 고등학교 시절 매일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꿈이 영화감독으로 바뀌기 전까지는.


고등학교 수학여행_타이타닉의 한 장면을 재연
고등학교 수행여행_마라도 짜장면, 맛없었음


장래희망이 영화감독으로 바뀌자 사진보다는 영상으로 기록했고, 사진을 찍을 때는 필름 카메라 대신 스마트폰을 들었다. 10년이 지나니, 핸드폰의 용량을 꽉 채울 만큼의 영상과 사진이 남았다. 앞으로 계속 기록하려면 핸드폰의 사진앨범을 정리해야 했지만 필요 없는 것을 고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퇴근길의 노을, 각기 다른 카페의 커피잔,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들 같이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사진들은 찍고 나서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지워버리기엔 아까웠다. 카메라에게 내 삶을 빼앗겨 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찍은 사진으로 뒤덮인 삶. TV에 방영된 물건을 버리지 못해 쓰레기가 가득한 집에서 사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필름 카메라를 꺼냈다. 연속 촬영도 불가능하고, 찍은 사진을 바로 확인할 수 없는 필름 카메라로 그 순간의 몇 장만 남기로 한 것이었다.


10년 전 보다 필름 값이 많이 올라서 한 장 한 장 정성을 들여서 찍을 수밖에 없었다. '핸드폰으로 한 장만 걸려라'라는 생각으로 마구잡이로 셔터를 누르 던 때와 확실히 달랐다. 좋은 빛을 찾기 위해 구도를 바꾸고, 더 멋진 장면을 찾으려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필름 한통을 다 찍고 한참 뒤에 사진관에서 스캔본을 받으면 나의 기억과 다른 사진들이 들어있었다. 너무 밝게 찍혀서 배경과 친구의 얼굴이 구분되지 않기도 하고, 흔들려서 친구가 혼이 나간 사람처럼 나오기도 하고, 이중노출로 하늘에 물건이 떠있는 처럼 보이기도 했다. 핸드폰으로 찍었다면 망한 사진이었겠지만 필름 카메라로 찍힌 사진들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었다. 또 '이걸 정말 내가 찍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눈으로 본 것보다 더 아름답게 찍힌 사진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디지털카메라 대신,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며 기록의 늪에서 나를 구해냈지만 여전히 삶에서 반짝이는 순간이 오면 황급히 카메라를 꺼내곤 한다. 기록하는 것에 빈도수만 줄었을 뿐 그 순간을 즐기지 못하고 기록하는 습관은 완전히 버리지 못한 것이다. 만약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면 뷰파인더가 아닌 내 두 눈으로 그 장면을 볼 자신이 없다. 앞서 말한 숀 코넬이 카메라를 내려놓고 두 눈으로 그 순간을 담을 수 있었던 건 삶의 진정한 이유에 대해서 알기 때문인 것 같다. 월터가 숀 코넬을 찾기 위해 경험한 것들이 사진 한 장 남지 않았고, 애초에 거길 간 게 오해 때문이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사진 한 장 때문에 오지까지 자신을 찾아온 월터를 숀 코넬이 나무라지 않듯이, 순간을 놓칠까 봐 조급해하는 나를 나무라지 않기로 했다. 다만, 필름 카메라로 꾸준히 사진을 찍으면서 정말 놓칠 수 없는 순간을 마주했을 때, 카메라를 꺼내느라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만약 그런 날이 와서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다면, 마음에 담긴 순간을 글로 적어 공유하고 싶다.



올해 찍은 사진_고등학교 때 보다 못 찍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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