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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nsn Mar 31. 2021

필름 카메라, 72 그리고 36

순간을 담아내고 싶은 마음

작년 이맘때쯤 필름 카메라에 뒤늦은 발동이 걸렸다. 한창 유행일 때도 관심이 생기지 않았는데, 지인의 카메라를 직접 만져보니 꽤 재미있는 장난감이라 느껴졌던 것이다. 버튼을 누르면 길게 나는 셔터 소리와 한 장 찍을 때마다 톱니바퀴를 돌려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마음에 들었다. 


며칠 동안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올림푸스 펜 EE-3'을 들였다. 작고 귀여운 하프카메라였다. 필름을 2배로 쓸 수 있다는 점이 욕심 많은 나랑 잘 맞았다. 필름은 보통 한 롤에 36장의 사진을 담을 수 있는데, 디지털카메라에 익숙해진 내게 '36'이라는 숫자는 터무니없이 작았다. 신중하다 못해 피사체를 인색한 눈으로 보게 만든다고나 할까. 처음부터 36장을 찍어야 했다면, 나는 최상의 36장을 담아야 한다는 부담감에 결국은 아무것도 찍지 못했으리라.


반면 하프카메라는 한 롤에 72장을 찍을 수 있다. 물론 72번의 기회가 나를 합리적인 사람으로 바꿔 주진 않았다. 마음이라는 게 참 묘해서 36장일 땐 셔터 한 번 누르기가 그렇게 망설여지더니, 2배가 되니 인심이 아주 후해졌다. 지인의 카메라로 찍을 땐 숨까지 꾹 참아가며 적당한 순간을 고르고 골랐는데 말이다. 같은 것을 여러 번 찍는 일도 흔했다. 바로 결과물을 확인할 수 없으니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1년간 나름대로 성실하게 사진을 찍었다. 다 쓴 필름은 한 롤, 두 롤 쌓였고, 길눈이 어두운 나지만 현상소쯤은 눈감고도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내가 사진을 찍는 이유에 대해 깨달아갔다. 평소라면 지워버렸을 부자연스러운 사진도 필름이라는 이유로 지우지 못하고, 그렇게 내팽개쳐둔 사진이 몇 달 후에는 다시 괜찮게 보이는 것을 경험하면서. 내 못난 얼굴과 부자연스러운 포즈보다도 사진을 찍던 순간이 훨씬 머리에 스친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사진을 찍는 이유는 그 순간을 담아두고 싶다는 마음, 그게 전부였다는 것을.


사실은 아주 간단한 깨달음이었다. 누구나 스마트폰에는 수십 장의 비슷한 사진들이 있지 않은가. 다음 장은 더 괜찮겠지, 다음 장이 좀 더 잘 나왔겠지, 라는 기대로 한 장 한 장 삭제하다 보면 어느새 모든 사진은 지워지고 없다. 간편하게 지워지는 사진. 사실 나는 그 순간을 담아두고 싶었을 뿐인데... 쉽게 찍힌 사진 앞에서는 쉽게 그 마음을 잊어버린다. 


필름 사진을 볼 때면 셔터를 누르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프레임 밖에 존재하는 그 사람과의 대화, 그 날의 분위기, 함께 걸었던 길까지도... 사진을 찍고 나면 잘 나왔을 거라고 나를 속인다, 아니 못 나왔으면 또 어떠냐고 우긴다. 그래도 나한텐 소중한 사진인 건 여전할 텐데. 그러니 굳이 같은 것을 두 개 찍을 이유가 없다. 뜻대로 나오지 않는 사진을 존중할 수 있게 된 건, 프레임 밖에 있는 내가 그 순간을 얼마나 담아두고 싶었는지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72는 이제 내게 너무 큰 숫자가 되어 버렸다. 72장을 다 찍는 데는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기다리다 지쳐 허투루 셔터를 누르는 일은 피하고 싶다. 36이 딱 좋다. 피사체에 너무 인색하지도 너무 후해지지도 않는 36이, 나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는 36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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