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는 방앗간을 들락날락, 나는 도서관을 들락날락 하지요.
3학년을 마치고 맞이한 여름 방학. 이번 여름엔 독일어 수업을 듣느라 일주일에 2번 학교를 갔다. 덕분에 학교 도서관에 자주 들락날락거리게 되었다.
나는 평소 방학 때- 특히 여름에 책을 몰아서 읽는 편이다. 학기 중에 읽으라면 읽을 수 있겠지만 과제와 시험이 서서히 몰아치면 책을 읽는 것도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늘 방학이 되면 동네 도서관에 가서 책을 가득 빌려오곤 했다. 한적한 동네 카페에서 상쾌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읽는 책들은 얼마나 달콤했는지 모른다.
이제 나도 졸업이 얼마 남지 않다 보니 - 앞으로 책 읽을 시간이 점점 줄어들겠구나, 싶은 마음 때문이 자꾸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랬기에 이번 방학은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나 실컷 읽어보자는 다짐을 하고 갈 때마다 두 손 가득 책을 빌려왔다. 항상 욕심을 내서 빌려왔기에 자칫하면 끊어질 듯한 에코백을 아슬아슬하게 메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
우리 학교에 이렇게 다양한 책들이 있었다니. 책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동네 도서관 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학교 도서관에 오는 건데. 도서관 서가를 천천히 훑어보기만 해도 시간이 너무 빨리 갔다. 이제는 책 찾는 것도 익숙해져서 청구기호를 보고 순식간에 책을 찾는다. 덕분에 그동안의 방학 중 가장 많은 책을 읽었다. 행복한 여름이었다. 이 글은 나와 여름을 함께했던 책들의 기록이다.
열심히 빌리고, 빌려온다
늘 마음 같아선 최대 반납 권수인 10권을 가득 채워 빌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무더운 여름 날씨에 책을 가득 짊어진 배낭을 들고 다니는 건 도저히 무리였기에, 항상 자제해서 5권 정도만 빌려오곤 했다.
물론 빌려왔다고 다 읽은 건 절대 아니다. 모두 읽지 못할 걸 뻔히 알면서도 자꾸 빌려오게 된다. 욕심내서 이것저것 빌려와 보면 유난히 손이 안 가는 책이 항상 있다. 소설, 에세이가 아닌 류의 책은 자주 그랬다. 그동안 늘 소설 종류만 읽어왔던 나이기에 이번 방학은 새로운 분야의 책을 읽어보려 노력했다.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 같다!
책상 위엔 더 이상 빈자리가 없는데도
이 책들은 삼촌이 회사 포인트로 내게 사주신 책 다섯 권. 책 사주신다는 얘기가 그렇게나 좋아서 무슨 소중한 보물 고르듯 심사숙고해서 책을 골랐다. 정말 웃긴 건 지금까지 저기서 읽은 책은 <오예! 스페셜티 커피!> 단 한 권이다. 집에 있는 책은 안 읽고 맨날 도서관에서 주구장창 빌려오는 게 참 웃기긴 하다.
이건 국제 도서전에서 사 온 매거진, 전공 심화 공부 좀 해보겠다고 빌려온 마르크스 <자본론>과 사회학 책. 슬프게도 잘 읽히지 않아 2번이나 빌려왔는데도 완독 하지 못했다. 서점 얘기하는 책들만 쏙 읽고 반납했다.
이렇게 쌓아두고 골라가면서 읽었다. 책을 여러 권 빌려오면 좋은 점이 한 책이 질릴 때마다 잠깐 멈추고 다른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거다. 아이스크림 골라 먹듯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번갈아 읽다 보면 어느새 여러 권을 다 읽은 상태가 된다. 물론 한번 손에 잡으면 놓을 수 없는 책들도 있었다.
베를린 '덕후'가 되어버리다
그렇다. 나는 이제 자타 공인 베를린 덕후가 되어버렸다. 이미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베를린 가서 한 달 살기 할 거야', 하고 동네방네 외치고 다녔으니까. 도서관에서 <베를린>을 검색하고 재밌어 보이는 책은 빌려와서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드는 생각은, 무조건 다시 가야겠다, 돈 열심히 모아야겠다, 독일어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독립서점에서 6월에 구매했던 <베를리너>도 드디어 다 읽었다! 전시기획이나 큐레이터 일을 하면서 3년 동안 베를린에 살았던 작가가 너무 부러워서, 요즘은 나도 어떻게 하면 베를린에서 일할 수 있을까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는 중이다.
내가 도서관을 여행하는 법
요즘 도시, 도시개발, 젠트리피케이션 같은 것에 관심이 생겨서 그런 책을 많이 빌려왔지만 정작 잘 읽지는 못했다. 자꾸만 여행 에세이, 수필 같은 거에 손이 갔다. 문화예술, 예술사회학 같은 책도 몇 권쯤 읽어보리라 마음먹었는데 왜 이리 잘 읽히지 않는 걸까. 올해 내로 다시 도전이다.
책, 독립서점, 책방 등 이런 거에 정말 꽂혀서 한동안은 이런 책들만 읽었다. 덕분에 다음 여행 때 방문해야 할 서점 리스트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서가 돌아다니다 우연히 발견한 <아무튼> 시리즈. 처음 보는 시리즈였는데, 이거 정말 너무 심각하게 재밌다. 작가들이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어떤 것에 대해 쓴 글인데, 애정과 관심이 듬뿍 어린 그 글을 읽고 있자면 나까지 덩달아 그것이 좋아지게 된다. 분량도 적당해서 술술 읽을 수 있다. <망원동>, <잡지>, <게스트하우스> 이렇게 읽었는데 <망원동>이 가장 좋았다. 가족여행으로 떠난 속초에서 들린 동아서점에서 동생은 <아무튼, 술>을 샀다!
이런 걸 읽었지
읽었던 책 중 몇 개만 추려보았다.
독후감 공모전에 제출하기 위해 읽었던 <경애의 마음> (너무 내 취향이 아니었기에 꾸역꾸역 읽었고 독후감 쓸 때도 너무 힘들었다), 뉴욕 여행 가고 싶어서 읽은 <나는 매일 뉴욕 간다>, 이번 방학 좋았던 책 중 하나인 <아무튼, 망원동>.
'방구석 1열'에 출연하신 변영주 감독님의 <영화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다>, 스무 살 때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했던 책인데 다시 도서관에서 마주쳐서 빌려오게 된 <PENSYLVANIA> (잔잔한 일상을 얘기하는 에세이집인데 의외로 여운이 길고 오래 남았다. 꿈속에서 에세이 속 등장인물들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도발적인 제목에 빌려왔지만 예상외로 재밌고 유익했던 <헬조선 인 앤 아웃>.
좋아하는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바다의 뚜껑>. (책 표지 일러스트가 내가 좋아하는 제로퍼제로 스튜디오의 작품이라 읽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역시나 여름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완벽한 소설이었다).
그리고 특이한 디자인에 내용까지 참신했던 <스몰 토크: 뉴욕에서의 대화>. 현대미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 책. 그리고 읽는 내내 너무 재밌었던 <도서관 여행하는 법>. 정말 '도서관'을 여행하는 사람이 있었다! 읽고 나서는 나조차도 도서관 여행을 떠나고 싶어 졌다.
세상은 넓고 좋은 책은 많다
위 3권은 여행을 떠난 속초에서 들린 <동아서점>, 강릉 <고래 서점>에서 발견한 책들이다. 역시 세상은 넓고 내가 모르는 좋은 책은 너무도 많다. 서점 구경하는 건 왜 이렇게 재밌는 걸까. 정말 한번 구경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덕분에 내 지갑은 너무도 쉽게 열리곤 하지만.
그렇게 이번 방학 총 35권의 책을 읽었다. 방학 중 최대 기록이다. 이번 방학 열심히 놀며 돌아다녔는데도 이렇게 많이 읽은 게 신기하다. 몇 권을 읽었는지는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무슨 책을 언제 읽었는지 기록해두고 싶어서 매년 이렇게 다이어리 뒤에 적어두곤 한다.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은 모두 읽은 것만 같아 행복했던 이번 방학이었다.
책 읽는 건 왜 이렇게 재밌고 즐거울까. 몇 년 전만 해도 책 읽는 습관 들이느라 꽤나 고생했는데, 다행히 지금은 난독증도 사라졌고 어떤 책이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문제는 읽으면 읽을수록 읽고 싶은 책들이 더없이 늘어난다. 읽고 싶은 것 위주로 책을 편식하는 것 같긴 하지만, 학술적인 책도 익숙해지려 노력해봐야지. 책으로 너무나 풍족했던 이번 방학, 덕분에 행복했던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