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가을, 학교 문예공모전 독후감 부문 최우수상 수상
유난히 변덕스런 날들의 연속이었던 지난여름, 나는 힘겨웠던 봄 학기를 보내고 방학이 시작 될 무렵 보라색 표지를 지닌 소설 <데미안>을 집어 들었다. 이전까지 데미안은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었지만 제목만큼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손꼽히는 명작이라고 익히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우리 집 거실 책장에 꽂혀져 있던 청소년을 위한 데미안,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데미안을 주제로 개최된 북 콘서트까지. 데미안은 항상 곁에 있었지만 이 책을 읽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올해 초 나는 난생 처음 겪어보는 일들과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했고 끊이지 않는 생각과 고민들은 나를 괴롭게만 했다. 나는 공허하고 외로운 마음에 책들이라면 그래도 이 빈자리를 채워주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했다. 결국 나는 평소 읽고 싶었던 3권의 책을 나에게 선물했다. 오만과 편견, 자기만의 방, 그리고 바로 데미안. 나는 가장 읽어보고 싶었던 데미안을 집어 들었다.
소설은 싱클레어라는 한 남자아이의 어린 시절로부터 전개되어진다. 사실 처음 책을 펼치고 나선 쉽게 집중할 수 없었고 책의 진도도 좀처럼 나가지 않았다. 평소 성장소설을 즐겨 읽지 않았던 탓일까. 하지만 싱클레어가 유년기에서 소년기로, 그리고 청년기로 접어드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니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다. 나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도 남겨진 여운에 쉽사리 책을 덮지 못했다. 아, 세상이 이렇게 변해왔어도, 세월이 얼마만큼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리는 분명히 존재하는구나.
<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가 어린 시절과 소년기를 지나 어른이 되기까지 성장해가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열 살 무렵의 싱클레어는 자신이 있는 밝은 세계 외에도 어두운 세계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하고, 불량아이 크로머에게 거짓말을 한 사실이 들통 나면서 그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싱클레어의 좁고 작은 세상은 그의 학교로 새로 전학 온 데미안을 만나서부터 전환점을 맞게 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보다 몇 학년 위의 학생이었고 또래 아이들과는 달리 신비롭고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묘한 데미안의 분위기에 이끌린 싱클레어는 그와 점점 친해지게 되고 둘은 매일같이 밤새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지녔던 기존의 고정관념들을 깨트리며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며, 어린 싱클레어는 그런 데미안을 동경하게 되고 삶의 방향성을 찾아나가게 된다.
그러나 싱클레어에게도 혼돈의 사춘기가 찾아오면서 그는 긴 방황의 시기를 겪게 되고 데미안과도 멀어지게 된다. 하지만 끊임없는 성찰과 고민, 그리고 자신과의 투쟁을 통해 결국 싱클레어는 편지에 쓰여 있던 데미안의 말처럼 ‘하나의 세계’를 깨트리고 그 밖으로 나오게 된다.
싱클레어의 1인칭 시점으로 쓰여 진 소설은 굉장히 섬세하고 예민한 문체를 가지고 있다. 싱클레어가 성장하며 겪는 모든 사건들은 그의 관점에서 세밀하게 묘사되어 나는 그 생각들에 온전히 이입하며 읽어나갈 수 있었다. 누구든지 그 나이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그의 이야기에 온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마음에 친구나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강해보이고 싶다는 마음에 불량한 아이들의 행동을 따라하며 그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고, 자신을 키워준 부모님에게 마저도 모질게 대하기 마련이니까.
싱클레어의 방황은 우리의 것들과도 꼭 닮아있다. 나 또한 누구보다 격렬히 심한 사춘기를 겪었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찾아온 사춘기는 나를 폐쇄적이고 비관적인 아이로 만들었다. 친구들과의 관계는 맘처럼 쉽지 않았고, 공부에도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부모님과 같이 다니기를 꺼려했으며 반항하고 말대꾸하기를 반복했다. 나보다 어린 동생도 보살피지는 못할망정 매일같이 다투기만 했다. 주말에도 밖에 나가기보단 집에 박혀 나만의 세상에 갇혀 있었고, 나의 유일한 행복은 수많은 음악들을 찾아다니며 책상에 앉아 하루 종일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심란했던 방황의 시기는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잠잠해졌다. 친구들과 즐겁게 어울리며 많은 곳을 놀러 다녔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를 포함한 모든 친구들은 ‘대학’이라는 한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야만 했다. 우리는 놀고 있는 와중에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불안감에 항상 시달렸다. 모든 어른들과 학교의 선생님들은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은 대학에 가서 하라며, 그땐 아무도 너희를 간섭하고 제약하지 않으니 일단 지금은 공부에 집중하라고 말했다. 마치 대학만 가면 인생의 모든 일들은 해결된다는 듯이. 그러니 너희들의 열망과 삶에 대한 고민은 잠시 미뤄두렴. 우리는 입시를 위한 공부를 하며 단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긴 경주는 11월 가을이 되어서야 막을 내렸고, 비록 평소보다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을 받았지만 나는 배우고 싶었던 과에 원서를 넣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래. 이제 나는 드디어 자유로워졌구나. 선생님들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어른들이 우리에게 했던 말들처럼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을 맘껏 하며 세상을 즐길 수 있겠구나. 나는 더 이상 미성년자도 아니고 그렇게나 열망했던 스무 살, 어른이구나.
하지만 모든 기대는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막상 스무 살이 되니 나는 세상에 내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중, 고등학교 때만 해도 대학만 가면 모든 고민과 방황은 사라질 줄 알았는데, 왜 나는 행복하지는 못할망정 더 힘들고 괴로운 거지? 오히려 단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달리던 그 때가 더 편했던 거다. 예전엔 내가 무엇이 될지, 어떻게 살 것이며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들은 미뤄 두고 일단 공부만 하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모든 선택과 책임은 나의 몫이었고, 모든 대가도 내가 감당해야만 했다. 싱클레어처럼 나 또한 낯설고 어렵기만 한 세상을 직면한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허비하고 놀기만 해도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고, 그럴수록 오히려 마음은 더욱 불안하기만 했다. 세상은 그다지 살갑지 않았고, 대학에서 맞닥뜨렸던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피로함을 안겨주었다. 숨겨져 있던 나의 이기적인 모습과 사람들에게 맘대로 상처를 주는 모습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대학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도 사라졌으니 이젠 어디로 달려가야만 하는지도 불분명했다. 대체 학교의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뭘 알려주고 가르쳐 줬던 걸까. 수업시간에 배웠던 모든 것들은 지금 나의 방황과 고민에는 아무 짝도 소용이 없었다. 인생은 명쾌하게 하나의 답으로 떨어지는 수학문제가 아니었다. 갑자기 세상에 던져진 우리에게 그 누구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랬다. 싱클레어가 긴 방황을 멈추고 난 뒤 데미안에게 보낸 알을 뚫고 날아오르는 매의 그림처럼, 우리는 모두 한 마리의 새이고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만 했던 것이다. 나를 둘러싼 작고 좁은 세계를 깨트리고, 그 밖으로 날아올라야만 했던 거다. 비록 그 과정이 순탄하고 아름답지만은 않더라도 말이다. <데미안>을 읽기 전까지 나는 그 사실을 단지 어렴풋이 알고만 있을 뿐, 확신하지 못했고 실패할까 두려웠으며 나의 모든 선택과 결정은 위태롭고 불안하기만 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도 괜찮은 걸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아나가야 하는 걸까. 미래엔 무엇이 되어야 하나.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나는 드디어 확신했다. 데미안의 말처럼, 내 안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나 자신보다 더 잘 해낼 수 있는 어떤 것이 있구나. 내가 겪은 도전과 실패와 착오들은 결코 헛되지 않았었구나. 어떤 일이든 쉬운 일은 없으며, 모든 결정은 내가 온전히 결정해야만 하고 인생에는 정답이 없구나.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 살기위해 나는 어떻게든 싸워나가야 하는구나. 비록 그 과정이 손에 잡힐 듯 말 듯 모호함의 연속이더라도 말이다. 더 많이 배우고, 내 안에서 외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것을 따라가면서 일단 무엇이든 해보고 경험해야겠구나.
대학에 입학하고 난생 처음 겪었던 나의 혼란과 괴로움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인생은 누군가 알려주는 것이 아닌,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내가 배우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 이었으니까. 모든 성장의 과정이 항상 아름다워야만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아름답기만 하다면 그건 거짓이며 헛된 삶이다. 투쟁과 실패가 없다면 우리는 게으름과 나태에 빠져 도태되어 버릴 것이니까. 생각해보면 나의 선택과 도전이 비록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을 때조차도 나는 항상 무엇인가를 배웠다. 오히려 성공했을 때 보단 실패했을 때 더 많은 경험과 진리들을 얻었었다. 싱클레어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엄청난 위안과 동질감을 얻었다. 마치 그가 나의 마음을 꿰뚫어본 기분이 들었다.
열심히 애쓰면 플라톤을 읽을 수 있었고, 삼각법 과제를 풀거나 화학 분석을 따라갈 수 있었다. 단 한 가지만 나는 할 수 없었다. 내 안에 어둡게 숨겨진 목표를 끌어내어 내 앞 어딘가에 그려내는 일, 교수나 판사, 의사나 예술가가 될 것이며, 그러자면 얼마나 걸리고, 그것이 어떤 장점들을 가질 것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처럼 그려내는 일, 그것은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나도 언젠가 그런 무엇이 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내가 그걸 안단 말인가. 어쩌면 나도 찾고 또 계속 찾아야겠지.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자신의 ‘구원자’ 라고 명명한다. 그는 데미안이 건넨 진심어린 말들과 조언으로 자신의 좁은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구축하는데 원동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싱클레어의 모든 성장이 순전히 데미안 덕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싱클레어의 구원자가 아니다. 데미안은 단지 싱클레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것을 꺼내어 주는데 도움과 자극을 주는 ‘멘토’ 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영화 <아가씨>에서 주인공 히데코는 자신을 백작의 손아귀로부터 구출하고 드넓은 세상 밖으로 꺼내준 숙희를 자신의 구원자라고 칭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 숙희와 같은 구원자가 올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삶이 지치고 힘들 때면 이 피폐한 삶의 구렁텅이에서 나를 꺼내줄 구원자가 나타나 주기를 바래왔었다. 내 힘으로 현실에 부딪히며 직면하기엔 두려웠고 그저 현실을 외면하고만 싶었으니까. 그래서 우울한 영화들과 음악, 그리고 책들에 의존하거나 모든 일을 제쳐두고 공연을 보러가는 등 저 멀리 도피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모든 건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여전히 모든 결정과 선택들은 나에게 남겨진 것이었고,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해 내 삶을 변혁시켜 주지 못했다. 데미안을 읽고선 이를 더 확신하게 되었다. 싱클레어도, 자신을 지지하며 좋은 조언을 해주는 데미안을 만나 셀 수 없이 수많은 도움을 얻었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과 싸움으로 성장하여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온 것이다. 물론 싱클레어가 우연히 마주친 이상향의 여자 ‘베아트리체’ 가 그의 내면을 바로잡고 방황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준 것처럼, 자신이 동경하는 롤 모델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누구나 자신이 바라는 이상향의 사람이 존재 할 것이다.
나는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하고 음악을 포함한 문화예술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는 만큼 예술가들의 삶들을 동경하고, 진솔하게 자신만의 글을 써내려나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또한 자신만의 분위기가 있고 거짓됨 없이 담백하고 사려 깊은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하기도 한다. 그들이 읽는 책을 읽어보거나, 그들이 듣는 음악을 듣거나, 그들이 하는 말에 영감을 받고 원동력을 얻기도 한다. 물론 그들을 통해 나는 자극을 받고 행동으로 실천하기도 하고 더 나은 내가 되는데 많은 도움을 얻는다. 하지만 언제나 나는 온전한 ‘나’ 자신일 뿐이었고, 내가 아무리 그들을 닮으려고 노력한들 나는 그들과 똑같아 질 수 없었다. 일시적인 효과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영원하지 못하다. 싱클레어도 방황의 시기에 베아트리체를 생각하며 욕망을 절제하고 자신만의 선한 세계를 구축하려 노력했지만, 그 힘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만의 내적 세계와 자아는 남이 만들어 주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동경하는 사람을 닮으려고 아무리 노력하였지만 그럴 수 없었고 괴리감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나만의 생각과 사고를 수립하여 스스로 내 세계를 만들어 나가야만 했다. 모든 정답은 내 마음 속 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인데, 나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보단 밖을 헤매며 외부의 것들에 의존해왔던 것이다.
싱클레어는 기나긴 방황의 시간을 마치고 대학에 입학하였지만 여전히 고민은 끝나지 않았고 삶의 목표는 불분명한 상태였다. 그러던 중 오래간 만나지 못했던 데미안과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만나고, 싱클레어는 그들의 공동체 모임에 함께하면서 점차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깨닫고 그에 가까워지게 된다.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시절도 잠시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그들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전쟁에 함께 참전한다. 싱클레어는 부상을 당하여 병원 침대에 누워 많은 생각에 잠기던 중, 자신의 곁에 누워 있는 데미안을 발견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마지막 말을 건네며 입맞춤을 건넨다.
다음날 아침 데미안은 사라져 버렸지만, 싱클레어는 이제 데미안과 완전히 닮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수많은 투쟁 끝에 드디어 싱클레어는 알을 박차고 나와 새로운 세계에 도달한 것이다. 어쩌면 데미안은 싱클레어와 별개의 인물이 아닌, 싱클레어 속에 잠재되어 있던 자기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싱클레어는 자신이 바라고 바라던 데미안이 된 것이다.
J. 허슬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스스로 알을 깨면 한 마리의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깨어주면 계란 프라이가 된다. 인생은 언제나 스스로 부딪혀 경험하고 도전하는 사람에게 더 큰 영광을 안겨준다.’ 싱클레어는 자신 내면의 소리에 집중했고 끊임없는 투쟁 끝에 마침내 달콤한 선물을 건네받았다. 데미안의 모든 문장과 인물들의 대화들은 내 맘을 비집고 들어와 스며들었다. 나는 현재 나의 끊임없는 방황과 고민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건네받았고 데미안은 절박했던 나에게 내려온 한 줄기 빛이었다. 지금 나의 성장과정이 불안하고 불분명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며 더 많이 고민하고 배우고, 경험하며 도전하여 마침내 알을 깨고 나와야만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지금도 나는 혼란스럽고 불완전한 존재이며 여전히 미래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투쟁하는 자에겐 반드시 달콤한 보상이 있음을 이제는 알기에, 나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음껏 도전해보고 배워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이제는 감사하기만 하다. 반드시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며, 절대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힘겨워 하던 나에게 ‘네 인생에 낭비된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었을 거야.’ 라고 따뜻한 말을 건네준 친구의 말을 가슴에 다시 새겨본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마침내 데미안이 될 것이다. 각자의 마음속에 그리며 꿈꿔왔던 그 모습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