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다사다난 독일어 공부 이야기
3학년 2학기를 마치고 맞이한 이번 여름 방학. 독일어를 다시 배워보기로 했다. 정작 독일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할 때는 열심히 배우지도 않았으면서 갑자기 웬 독일어냐고 내게 묻는다면, 그러게나 말이다. 정말 나도 이렇게 독일어를 다시 배우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더니 그 말이 딱 맞나 보다. 독일어와 나와의 첫 만남은 그다지 순탄치 많은 않았다.
독일어에 뜻이 있어서 독일로 떠났던 건 아니다. 유럽의 문화를 좋아했고 동경했기에 유럽 국가에서 살아보며 공부하고, 그들의 문화를 경험하고 싶었다. 하지만 영어를 사용하는 영국은 생활비가 너무도 비쌌다. 프랑스도 가고 싶긴 했으나 전반적인 학생 복지는 독일이 훨씬 좋았고 물가도 저렴할뿐더러 안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 전공인 국제정치학을 들을 수 있었고,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이 꽤 많았고 다양했다. 더 자잘한 이유를 들어보자면 나는 헤르만 헤세나 카프카 같은 독일 작가들을 좋아했고 오랜 시간 피아노를 쳐왔기에 바흐, 슈만, 하이든, 슈베르트 등이 태어난 클래식의 고장을 직접 방문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교환학생을 떠나기 전 독일어를 제대로 공부하고 간 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학원을 다니거나 혼자서 공부했다고 했다. 반면 나는 그저 독일어 교재 한 권을 사서 알파벳 발음을 익히고 깨작깨작 몇몇 문장을 외웠을 뿐이었다. 가끔 회화 어플도 사용해 가면서.
조금이라고 배우고 가는 게 좋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 내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그저'독일 사람들 다 영어 잘한다고들 하고, 학교에서 수업도 영어로 들을 거고, 영어를 잘하는 게 중요하지 독일어가 정말 필요할까?' 하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독일 가서 제대로 배워보면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독일에서는 가장 기초반인 독일어 A1.1반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너무 마음을 닫아버린 걸까. 교수님도 너무 친절하셨고 10명 남짓의 소수 정예 수업이라 공부하기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는데, 배우고자 하는 의욕이 없었다. 게다가 하루 중 가장 나른하고 졸린 오후 2시에 매일매일 독일어 수업을 듣는 건 정말이지 힘겹기만 했다.
초반에는 나름 열심히 듣었지만 점점 복습을 미루고, 왜 공부해야 하는 건지 의문만 들었다. 학교에선 영어만으로도 충분히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독일어는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이 시간에 영어공부를 하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열심히 배워보려는 의지도 없었던 내게 극악의 문법 난이도를 자랑하는 독일어는 결국 나를 포기의 길로 이끌었다. 그렇게 꾹꾹 참으면서 두 달 조금 넘게 강의를 듣다가 결국 나는 강의를 드롭해버렸다. 멍하게 보내는 두 시간이 의미 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 후회되는 일이다. 그때 독일어를 열심히 배웠더라면 어땠을까. 평소 일상생활에서 독일어를 못해서 겪는 어려움도 없었을 거고, 독일 친구들과 독일어로 대화도 나눌 수 있었을 테고, 무뚝뚝한 독일 사람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상생활에서 보이고 들리는 독일어를 조금씩 이해하고 알아가는 즐거움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심지어 한국으로 돌아올 땐 캐리어가 이미 너무 무거워졌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산 독일어 교재도 기숙사에 두고 왔다. 너는 여전히 내가 살던 기숙사 지하실 창고에 차분히 놓여있을까? 지금 생각해도 내 행동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 다시는 독일어를 마주치지 않을 것처럼 행동했던 그때. 결국 나중엔 아쉬운 마음과 후회만이 가득 남았다.
독일에서의 한 학기를 마치고 떠난 프랑스 여행. 그곳에서 나는 프랑스어의 둥그스름하고 부드러운 발음에 푹 빠져버렸다. 프랑스만이 지닌 자유분방하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좋기도 했다. 그렇게 프랑스의 매력에 빠져서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책까지 주문해서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주변 친구들은 독일어도 아니고 뜬금없이 프랑스어냐며 의아해했다. 하지만 독일어는 너무 재미없는 걸 어떡해. 내겐 딱딱하고 건조하게 들리는 독일어보다 둥글둥글한 프랑스어 발음이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심지어는 독일 말고 프랑스로 교환학생을 갔어야 했나, 하는 생각까지 했으니. 말 다 했다.
그런데 정말이지 사람 마음은 이토록 알 수가 없다. 독일어에 대한 내 마음은 시간이 흐르자 어느덧 열망과 동경으로 변해버렸다. 1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내 마음을 180도 뒤집어 놓았다.
일상에서 갑작스레 독일어를 마주치면 자꾸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독일어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반사적으로 사진을 찍었다. 6개월 동안 나름 익숙하게 봐왔다고 그런 건지 괜히 반가운 마음만 가득했다. 어쩐지 독일어가 멋져 보여서 혼자서 작은 소리로 읽어보고, 무슨 뜻인지 검색해보고, 그러고 나면 독일어를 잘하고 싶어 지고, 급기야 내가 독일어를 못한다는 사실이 분해지기까지 했다.
내 취향을 저격한 소설. 책 앞날개를 펼쳐 작가 소개를 읽어보면 어쩐지 매번 독일 출신의 작가다. 서점에서는 자꾸 '베를린', '독일 문화, 디자인, 정치, 여행' 같은 책만 눈에 들어온다. 도서관 책장을 구경하다 독일과 관련된 책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망설임 없이 대출해서 집으로 데려오곤 했다.
지난봄 친구와 함께 방문한 어느 무대미술가의 전시회. 알고 보니 작가는 독일 출신이다. 괜스레 더 멋져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방문했던 많은 유럽의 미술관들 중 가장 내 취향에 맞았던 건 독일의 미술관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작년 가을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관람했던 독일 영화 <SWIMMING>. 영화는 정말 너무도 좋았기에 나는 영화가 끝나고 제작자분들에게 짧은 독일어로 말을 건네고 사인을 받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내가 독일어를 잘했더라면 더 오래 대화를 나눠볼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올해 방문했던 전주 국제 영화제에선 보지도 않은 영화인데 단지 독일 영화이고, 독일어가 크게 쓰여있다는 이유로 포스터를 구매해 왔다. 지금도 내 방 벽 한구석을 장식하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독일이라는 존재는 내 일상에 아주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막연히 가지고 있던 환상도 와장창 깨져버렸고, 인종차별도 수없이 당했고, 때론 우울하기도 했고 맘고생도 많이 했던 독일에서의 시간이었다. 좋은 추억도 많이 선물해줬지만 그렇지 않기도 했던 애증의 독일. 그땐 정말 지겨워져서 독일은 이제 안 와도 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다음 여행지를 독일로 기약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자꾸 독일을 찾았다. 정확한 이유는 나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런 내 모습을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단 한 가지 생각만 명확해질 뿐이었다. '아, 독일어 다시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
얘기가 너무 길었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로 방학 동안 학교에서 열리는 독일어 수업을 듣게 되었다. 일주일에 두 번, 하루 4시간 동안 수업을 하는데 수강생 대부분은 독어독문학과 학생들이다. 나는 조금이나마 배웠던 것도 모두 까먹어 버려서 원래대로라면 가장 기초반 수업인 A1.1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신청 인원이 적어 반이 개설되지 않아 결국 난 그 위 단계인 A1.2반에 오게 되었다.
처음엔 기가 많이 죽었다. 첫 수업에서는 정말 이해할 수 있는 말이 거의 없었다. 회화 위주의 수업이라 수업 시간 자주 입을 열어야 했는데, 옆자리에 앉은 파트너와 대화 연습이라도 할 때면 끊임없이 버벅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다른 학생들은 교수님의 질문에 매번 유창하게 대답하는데 나는 정말 기초적인 것도 몰라서 유치한 질문을 하기 바빴다. 내가 너무 부끄러워졌다. 독일어를 열심히 공부했던 건 아니었어도 나름 6개월 동안 살다 왔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저 한숨만 나왔다. 역시 독일어는 나와 맞지 않는 거였나.
그래도 노력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수업을 듣고 복습도 하고, 새로 구매한 문법책을 한 페이지씩 풀어 나가며 공부를 했다. 혼자서 풀어봤을 땐 그저 막막했는데 수업을 들으면서 같이 공부하니 이해도가 확연히 높아졌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퍼즐처럼 하나 둘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내 앞자리에 앉았던 스무 살 친구와 친해져서 서로 도움도 받고, 쉬는 시간 간식을 나눠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곤 했다.
교수님께 질문도 열심히 하고 차근차근 배워가며 재미를 붙였다. 아, 이제야 독일어가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독일로 떠나기 전보다 돌아온 후 독일이 더 좋아져 버린 나. 독일어를 배우는 나의 자세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건가. 끝없이 암기해야 하는 명사의 성과 수많은 관사가 나를 힘들게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예전엔 이해하지 못했던 단어와 문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그저 기뻤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누구보다도 가벼웠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은 이미 이번 여름학기 독일어 수업이 종강한 이후다. 종강하고 나서는 여행도 다니고 공연도 보러 다니느라 복습을 소홀히 했지만, 이제 다시 이어나갈 예정이다. 왜냐면 개강하고 나서는 A2 단계 수업을 듣기로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냥 여름방학에만 배워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만두기엔 그동안 배운 게 너무 아깝고, 기왕이면 열심히 해서 자격증을 따 보자는 마음도 생겼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독일어를 열심히 해두면 나중에 좋은 기회가 생길 수도 있으니, 개강을 하고 나서도 꾸준히 독일어를 공부해 보려고 한다.
이제 내게는 작은 목표가 생겼다. 독일에서 가장 좋았던 도시 중 하나인 베를린. 그곳에서 한 달을 살아보는 것이다. 독일어만 사용하면서 지낼 수 있을 만큼, 독일인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실력을 늘려서 가는 것.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들떠온다.
여름 두 달 동안 무더운 날씨를 뚫고 열심히 들었던 독일어 수업. 끝나고 나니 아, 역시 듣길 잘했다! 하는 뿌듯한 마음뿐이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일처럼 설레고 들뜬다. 곧 다가올 가을에도 성실하고 꾸준하게 배워나가려고 한다. 내게는 그저 애증의 존재였던 독일어. 이제는 그냥 좋아하게 되어버린 것 같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3532
*위 글은 문화예술 플랫폼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