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베를린 일기> 리뷰
<베를린 일기>. 도서관에서 책들을 구경하다 우연히 발견한 책이었다. 예쁘장한 분홍색 표지를 지닌 이 책은 최민석 작가가 베를린에서 보낸 하루하루가 담긴 일기다. 지난여름 다녀온 베를린은 정말 좋았기에 빌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누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작가는 어느 문화단체의 후원을 받고 약 3달 동안 독일 베를린에서 공부하며 생활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는 10월 무렵 독일로 떠나, 베를린의 가을과 겨울을 보내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는 3달간의 베를린 생활을 하며 매일 일기를 기록했고, 모든 일기를 엮은 것이 책의 내용이다. 일기이기에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얘기들로 가득하다. 그 일상들은 우리의 것과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그것들이 결코 사소하지만은 않다.
베를린에서의 날들이라니. 낭만과 여유로 흘러 넘 칠 것만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독일에서 반년 동안 교환학생으로 지냈기에 공감 가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작가는 특유의 해학적인 문체로 덤덤하게 하루하루를 이야기해 주는데, 그걸 읽으면 피식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마음 한편이 짠해오기도 한다. 나만 힘들고 외로웠던 게 아니었구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모두 고독한 존재이구나.
우리는 모두 외로운 존재인 거다. 작가는 베를린이라는 낯선 땅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좌절하기도, 외로워하며 힘들어하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나 에너지를 얻고, 새로운 경험도 하며 따뜻한 위로를 얻는다. 내일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사실인데, 베를린은 한자로 백림(伯林)이라고 불린단다. 그래서 베를린이 분단되어 있을 시절에도 동베를린은 동백림(東伯林), 서베를린은 서백림(西伯林)이라 불렀다고 한다. 백림이라니, 너무 예쁜 이름이다. 왠지 새하얀 나무들로 가득 둘러싸여 있을 듯한 이미지다. 이젠 베를린이 아닌 백림으로 부르고 싶어 진다.
백림인들이 왜 생면부지의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눈웃음을 짓고, 왜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동거를 하고, 왜 아직도 시와 소설을 읽으며, 왜 작은 공동체의 행사에까지 먼 곳에서 달려와 주는지 알겠다. 이들은 모두 외롭다. 누구라도 베를린의 겨울 속에 한 시간만 있어 본다면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선배는 폴란드가 적적한 듯, "베를린에 있어서 좋겠어요, 볼 것도 많고!"라고 했는데, 나는 몹시 고독한 표정을 지으며 "헤르만 헤세가 졌다고 할 만큼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어서, 의도치 않게 매일 글을 쓰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헤르만 헤세가 졌다고 할 만큼의 외로운 생활. 저건 정말 진실이다. 독일에서 지내고 보니 정말로 알 것 같다. 독일 작가 헤세가 왜 여러 나라를 여행 다니기를 좋아했고, 특히나 이탈리아를 좋아했으며 노년을 스위스에서 보냈는지 알 것만 같다.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정돈되어 있고 깔끔하며 정신 사납지도 않다. 공기도 맑고 나무도 많다.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일도 거의 없다. 길을 다니다 사람들과 부딪힐 일도 없다. 모두 각자의 공간을 유지하며 생활해 나간다.
모든 가게들은 6시면 문을 닫고, 사람들은 3-4시면 퇴근하여 집에서 가족들과 저녁시간을 보내기에 독일의 밤거리는 조용하기만 하다. 한국의 밤거리는 화려하고 정신없이 번쩍거리곤 하는데, 독일에선 6시 이후로 불이 켜져 있는 가게를 찾기 힘들다.
잘 정돈되어 있는 도시는 우리를 편안하고 차분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어딘가 외롭고 쓸쓸하게 만들기도 한다. 옆 사람과 몸을 부대끼며 지하철을 타고, 시끌벅적한 거리를 걸으며 자란 우리에겐 그 환경이 더욱 낯설 테다.
특히 독일의 겨울은 악명 높기로 아주 유명하다. 해는 3-4시면 금세 저버려 햇빛을 못 받는 날도 허다하고, 하늘은 항상 흐리며 비와 눈은 변덕스럽게 내린다. 거리는 그저 삭막하고 고독하다. 베를린이라고 크게 다를 것 없다.
자유분방한 분위기와 예술적 영감이 가득한 베를린에도 겨울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물론 내가 마주한 건 푸르른 한여름의 베를린이었지만, 겨울의 모습은 그렇지 않을 테다. 실제로 많은 독일 사람들이 겨울이 오면 자주 우울감을 겪는다고 한다. 나는 비교적 좋은 날씨에 독일에서 살았음에도 힘들었는데, 작가는 겨울에 다녀왔으니 더 했을 것이다.
독일에서 내가 뼈저리게 느꼈던 사실은, 나는 이곳에서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것이었다. 지극히 당연한 그 사실은 자꾸만 나를 힘들게 했다. 귓가에는 낯선 독일 말들이 들려오고, 갑자기 타고 가던 기차가 멈춰 생판 모르는 곳에 내려져 몇 시간을 불안하게 기다리고, 먹을만한 음식은 소시지, 감자, 빵이 전부였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늘 살갑지만은 않았고, 식당에 들어가 몇십 분간 테이블에 앉아 웨이터에게 눈길을 주어도 못 본체 하며 주문을 받아주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내 얼굴을 보며 욕과 조롱을 하고 지나가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어느 것도 힘들지 않았던 일들이었는데. 언어도 문화도 낯선 이곳에서 나는 늘 한국을 그리워했다. 한국에 있을 가족과 친구들이 그렇게도 보고 싶었다. 이렇게 경험을 하며 유럽 생활에 대한 막연한 환상들을 하나씩 깨트려 나갔다. 독일에서 살아보지 않았다면 난 아직도 유럽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품으며 여전히 그들을 마냥 부러워만 했겠지.
사실 고백하자면 이 글은 비행기 안에서 쓰고 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려 한다. 왜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 줬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그저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라고. 내가 멍청하게 지낸 모든 날들에 대한 보상이라고...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이들의 환대에 대한 어떠한 이성적 이유도 찾을 수 없다.
작가가 기록한 마지막 날의 일기. 읽고 있자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던 날, 비행기가 이륙하고 지겨울 만큼 익숙하게 보았던 주황색의 세모 지붕들이 점점 멀어져 가자 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6개월간의 생활. 생각해보면 힘들고 외로웠던 날들만큼이나 행복했고 잊지 못할 순간들도 많았는데, 나는 왜 그렇게도 마음을 썩히며 괴로워했는지. 지난 순간들이 하나하나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나를 따뜻하게 대해준 이들을 결코 잊지 못하겠지. 함께 학교를 다니던 언니 오빠들, 누구보다 우리를 좋아해 주며 많은 시간을 보냈던 독일 친구들, 같은 플랫에 살며 소소한 얘기를 나누던 여러 국적의 아이들, 같은 수업을 들으며 친해진 친구들, 자주 만나 놀며 여행도 다니던 외국 친구들, 친절한 가게 직원까지도.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해 주고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들 - 그 모든 이들이 있었기에 나는 이렇게 낯선 타지에서의 삶을 살아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들에게 너무 고마웠다고, 다시 한번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