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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Dec 01. 2019

레코드페어와 연남동,
스물하나와 스물셋 그 어딘가에서

지난날의 너와 나



2019년 11월 10일 일요일,


 

오늘은 문화역 서울 284에서 열리는 레코드 페어를 다녀왔지. 손가락을 접으며 시간을 헤아려보니 어느덧 우리가 3년 연속 이곳에 함께 왔더라고. 시간이 정말 너무 빠른 것 같아. 


신기하게 매년 올 때마다 느끼는 생각과 감정이 모두 달라. 처음엔 충격 그 자체였고, 작년엔 엄청난 영감과 자극을 받았고, 이번에는 우리가 사고 싶었던 앨범들을 많이 사 왔지. 너는 데이빗 보위, 저수지의 개들 OST, 오아시스 LP를 샀고- 나는 슈만, 셀로니어스 몽크, 빈스 과랄디 트리오, 그리고 루 리드의 뉴욕 라이브 CD를 샀어. 이번엔 재즈 앨범을 두 개나 사 와버렸네. 웃기게도 우린 레코드 페어를 구경하고 나선 매번 홍대에 갔던 거 알아? 3년 연속 그랬던 걸 보면 우린 홍대를 아직도 좋아하나 봐. 질릴 만큼 갔는데도 말이야.


홍대엔 너랑 함께한 추억이 참 많아. 열일곱의 크리스마스이브, 너랑 같이 봤던 쏜애플 콘서트랑 - 열여덟 초봄의 아침 콘서트도 그렇고. 그 공연들은 아마 아직도, 아니 영원히 잊지 못하겠지. '안녕, 낯선 사람'이라는 카페도 되게 좋았잖아. Hello, Stranger. 그건 우리가 좋아하는 영화 <클로저>에 등장하는 대사기도 해. 홍대 앞 길가엔 알록달록한 노트를 파는 아저씨도 있지. 그때 사 왔던 노트들은 아직도 잘 쓰고 있어.


달콤하고 바삭한 초코칩 쿠키를 팔던 카페도 이따금 생각나. 공연 보기 전에 항상 구경하던 상상마당 1층 문구 샵도, 무표정한 주인아저씨가 있는 조그만 레코드 가게도. 아, 학교 끝나고 교복 차림으로 홍대를 돌아다니다 결국 아무 공연도 못 보고 돌아온 날도 있었네. 그땐 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얼른 자라나서 스무 살이 되기를 그렇게도 갈망했는데. 이젠 너무 아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어.  





이번 레코드페어도 역시 좋았어. 그렇지만 역시 스물한 살의 첫 레코드페어를 잊을 순 없는 것 같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잖아. 6월의 초여름, 머나먼 은평구까지 가서 열심히 구경했던 우리. 주머니에 돈이 없었어도 그냥 그 아름답고 어여쁜 것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지.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천국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싶었어. 만 오천 원짜리 맥 드마르코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하곤 살지 말지 한참을 망설이고, 천 원짜리 듀란듀란 엘피판을 겨우 샀던 우리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던 것 같아. 


다 구경하고 나서 벤치에 앉아 나눴던 대화 기억해? 정확히 무슨 대화였는지는 이제 생각조차 나지 않지만, 우리 딴에는 되게 진지하고 무거운 얘기들을 했던 것 같아. 지금 그걸 듣게 되다면 유치하다고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정말 진지했어. 제대로 살고 싶었고, 어떻게 해야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건지 고민했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꿈꿨지.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던 것 같아. 모든 게 서툴고 미숙하고 어리숙했지만, 마음만큼은 누구보다도 반짝이고 순수했던 그때.  





세상은 그대로인데 우리가 변해버린 걸까? 우리가 달라진 만큼 세상도 재빠르게 변해버린 것 같아. 그토록 좋아하던 평화롭고 아늑한 연남동의 풍경. 이제 그 모습은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변해있고, 우습게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는 건 ‘푸하하 크림빵’ 가게뿐이었지. 


우린 그곳을 한 번도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으니까, 오늘도 빵을 사이좋게 하나씩 들고 나왔지. 그리고 가게 앞 의자에 앉아 빵을 우물거리곤, 아, 오늘도 역시 맛있다! 감탄을 하고. 이 빵을 먹으면 순간순간이 떠올라. 바이바이 배드맨 공연을 보러 가기 전 라멘집에서 먹었던 크림빵, 익선동에서 종로까지 걸으며 나눠먹었던 크림빵, 그리고 오늘 이렇게 앉아서 먹는 크림빵. 고작 단순한 빵일 뿐인데 너무 많은 추억들이 녹아들어 있어. 


우리가 너무 좋아하는 연남동의 뮤직 펍, 그 주변도 이젠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버렸지. 지금은 죄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가게들 뿐이잖아. 다들 앞다투어 세련된 인테리어를 뽐내며 번쩍이는 네온사인 간판을 달고 있는데, 그저 낯설게만 느껴져. 2년 전 그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는데. 가게도 되게 구석진 데에 있어서 발이 꽁꽁 얼도록 한참을 헤맸었지. 그래도 덕분에 아기자기한 독립서점을 만나 구경할 수도 있었어. 지금 그 서점은 아직도 잘 있으려나 몰라. 




우리는 지금 무엇을 그리워하는 걸까. 아까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우리 같이 내 사진첩 사진 구경했잖아. 고작 2년 전일뿐인데 우리 모습은 왜 이렇게 앳되고 어려 보일까. 너도 스물한 살이 제일 좋았었다고 내게 말했지. 근데 나도 그래. 분명히 그때도 엄청 힘들었고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왜 그때가 이렇게 그리울까. 스물하나의 어리고 순수했던 마음? 아니면 모든 것에 설레고 들뜨던 어린아이 같던 모습들? 알을 깨고 밖으로 나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만끽하던 모습을 그리워하는 거려나. 


우리 예전엔 음악도 그렇게 많이 들었었는데. 야자 시간에 서로 요즘 뭐 듣는지 셋 리스트 공유하는 게 우리 낙이었잖아. 그때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도 행복했는데. 매점에서 사 온 아이스크림으로 그저 해맑게 웃을 수 있었지. 


맞다. 아까 버스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옥상달빛 노래 있잖아, 수고했어 오늘도. 그 노래 예전엔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언젠가부터 되게 슬프게 들리더라. 그래서 청승맞게도 사실 눈물이 조금 났어. 그저께도 아빠한테 생일 편지를 쓰다가 그렇게 울었는데. 자꾸 눈물만 많아지는 것 같아.  






그래도 결국 그 시간들이 모여서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으리라 믿어. 우리는 그때보다 몇 뼘 더 성장했을 테니까. 오늘 하루는 너무 특별하고 소중했어. 같은 감정을 느끼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어서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몰라. 우연히 발견해서 들어간 카페도 너무 근사했지. 올해 마신 최고의 커피였어. 창밖으론 비가 막 쏟아지고, 우리는 어두운 불빛 아래 따뜻한 라떼와 핫초코를 손에 쥐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지. 카페 안 사람들의 두터워진 옷차림을 보니 이제 겨울이 코앞으로 훌쩍 다가온 것 같더라.

 

언젠가 오늘 보낸 이 시간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저 내가 바라는 건 우리가 이 계절의 끝에서 한 해를 잘 마무리할 수 있기를, 아프지 않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단지 그것뿐이야. 추위에 옷깃을 여미고 몸을 자꾸 웅크리게 되어도, 마음만큼은 여름의 빛깔처럼 푸르를 수 있기를. 


갑자기 자우림의 스물다섯, 스물하나 노래가 생각난다. 우리 고등학생 때 그 노래 정말 좋아했잖아. 근데 있잖아, 모든 게 달라졌어도, 우리가 변하고 세상이 변해왔어도 - 그 노래만큼은 여전히 변함없이 좋을 것만 같아. 





자우림 - 스물다섯, 스물하나

https://youtu.be/qvJ1FHRR1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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