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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Sep 22. 2021

맑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도, 제주 DAY 9

때로는 욕심을 내려놓고 비울 줄 알아야 해



Today's BGM

이상은 - 비밀의 화원

https://www.youtube.com/watch?v=mrDL_A9hw3I






창밖을 내다보니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가 짙게 내려앉아 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산방산에 가려고 했는데.


그렇다면 오늘은 202번 버스를 타고 하루를 보내야겠다. 아침을 간단히 챙겨 먹고 숙소를 나섰다.





비를 뚫고 도착한 오설록 티하우스와 이니스프리 제주 하우스. 오설록 건물 앞엔 녹차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에 식물들은 더욱 싱그러움을 뽐낸다. 꼭 숲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탁 트인 통창과 라탄 소품은 창밖 풍경과 자연스레 어우러진다. 마침 평소 좋아하는 어라운드 매거진에서 제작한 이니스프리 매거진 'LOG'가 무료로 비치되어 있었기에 잊지 않고 한 권 챙겨 왔다.





따스하게 몸도 녹일 겸 제주 귤피차와 당근주스를 주문했다. 오롯하게 우러난 귤피차를 마시니 기분도 싱그럽구나. 당근 주스에 장식으로 달려있던 미니 당근은 웃음이 날 만큼 작고 귀엽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멍도 때리며 시간을 보냈다.





오후 무렵엔 꼭 가고 싶었던 책방 '소리 소문'도 들렀다. 검은 돌이 구석구석 보이는 점박이 외관이 괜히 귀엽다.


여닫이 문을 열고 들어오니 따뜻한 분위기가 우리를 반긴다. 택시를 타고 와야 하는 불편한 위치였음에도 서점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찬찬히 서가를 걷는다. 역시 재밌고 흥미로운 책들로 가득하다. 특히 멋진 일러스트레이터 분들의 그림으로 탄생한 리커버(Recover) 책들이 인상 깊었다. 노인과 바다, 위대한 개츠비 등 꾸준히 사랑받는 고전 명작들이 근사한 옷을 입고 있다.


그러던 중 마침 존 버거의 대표작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발견했다. 잠시 멈칫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들고 계산대로 다가갔다.


이로써 제주에서만 존 버거 책을 2권이나 구매했다! 수줍으신 사장님과도 짧은 대화를 나누고 노트를 펼쳐 오묘한 진녹색의 서점 도장도 쿵- 찍었다.





여기까진 모든 게 평화로웠다. 하지만 다른 북카페도 구경하고 싶었기에 점심도 먹기 전에 그곳을 먼저 들리기로 했다. 하지만 제주의 버스 배차간격은 어마 무시했고 아무리 기다려도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냥 걸어서 가기로 했다.


여차 저차 하여 북카페에 도착했지만 이미 엄마와 나는 너무 지친 상태였다. 근처의 유일한 음식점조차 이미 4시에 문을 닫아버렸고, 설상가상으로 숙소로 돌아가는 202번 버스도 눈앞에서 놓쳤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마주하기 싫은 나의 모습들까지도 직면해야 한다. 오늘도 끼니도 제대로 먹지 않고 무리한 일정으로 욕심을 부렸다. 혼자 다니는 여행이 아님에도 엄마를 배려하지 않고 내 의견만 고집했다. 함께 온 여행이라면 타인을 배려하며 맞춰 나가야 하는 건데. 이제야 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계속 절망하란 법은 없는 법일까. 침울한 기분으로 터벅터벅 걷던 중 두루치기 식당을 발견했다. 망설임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저렴한 가격에 든든하고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하루 종일 걸으며 고생해서 그런지 꿀맛 같은 식사였다. 가게를 나오는 길엔 사장님이 귤까지 선물로 쥐어주셨다.





비도 오고 유독 다사다난했던 하루. 한림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인 만큼 숙소 근처 맥주집에 들렀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임에도 아주 깊은 밤 같다. 파도는 유독 세차게 몰아친다. 머리칼에선 하루 종일 맞은 바람 때문에 꿉꿉한 바다 냄새가 난다.


몸을 녹이려 주문한 따뜻한 뱅쇼. 덕분에 서늘했던 몸이 조금씩 녹는다.


내일이면 이 동네와도 헤어지고 애월로 떠나야 한다. 짧은 며칠 동안 그새 또 정이 들었나.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엔 언제나 아쉬움이 담겨 있다.

 

여행 내내 들고 다닌 필름 카메라 롤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기록하고 싶은 순간을 만나면 셔터를 꾹 누르곤 했는데, 제주는 걸으면 걸을수록 더 멋진 풍경을 보여내는 바람에 '아, 방금 찍지 말고 지금 찍을 걸' 하고 늘 생각하게 된다. 그만큼 제주는 놀라운 풍광이 끝없이 펼쳐지는 무궁무진한 곳이다.





글에 나온 공간들

Good Places to Visit


책방 소리 소문

제주시 한림읍 중산간서로 4062

금능 반지하

제주시 한림읍 금능 9길 30

이니스프리 제주 하우스

서귀포시 안덕면 신화역사로 23

오설록 티 뮤지엄

서귀포시 안덕면 신화역사로 15

신창 두루치기

제주시 한경면 두신로 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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