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yeux Noël! (즐거운 성탄절 되세요!)

미약한 시작점

by 완다

- 봉수와 마담. 환영합니다.

- 봉수와 무슈. 감사합니다.

- 어떻게 오셨어요?

- 여행으로 왔어요.

- 처음이신가요?

- 이번이 세 번째예요.

- 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잘생긴 중년 남자였다. 마지막 인사 끝에는 눈웃음에 윙크까지.

입국 수속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예상치 못한 환대(?)에 얼떨떨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이 사람, 곧 퇴근이라 기분이 좋은가 보다.)


나는 일 년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날, 크리스마스이브에 프랑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침부터 나와 인천 공항에 잠시 머무르다가, 탑승 시간이 되자 딸과 나란히 에어차이나에 몸을 실었다. 대개 그래 왔듯 값싼 티켓을 구하느라 국적기는 타지 못했다. 그래도 인천 출발이니 한국사람들이 조금은 보일 줄 알았는데, 옆자리는 물론, 승무원까지 주변 모두가 중국인이었다. 중국어를 조금 할 줄 아는데도 괜히 긴장됐다.

그렇게 장시간 비행 끝에 내 앞머리는 떡이 지고 정확하게 5:5로 갈라지고 말았다. 기내 화장실에서 물로 적시고 헤어롤까지 말아봤지만 소용없었다. 이런 모습으로 프랑스에 입국한다니, 자신감이 떨어진 채 내 의식은 자연스레 이틀 전 집에서의 일로 흘러갔다.


책상 앞에 앉아 수첩을 넘기고 또 넘겨보고, 계산기를 두들겨 보다가... 그만 엎드린 채 꺼이꺼이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던 밤.

나는, 정말 미쳤다!


이혼을 했을 때도 그랬다.

합의였기 때문에, 일정에 맞춰 둘이 출석하고, 같이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하다 헤어졌다.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런 중대한 결단을 내릴 만큼 용기가 풍천한만큼, 맘 한쪽 구석으로는 두려웠다. 내가 하고자 하는 데로 일이 풀려간다는 건 뭔가 불안한 일이었다.

세상일이 원래 이렇게 내 뜻대로 되는 거였나 처음 알았다.

누가 나 좀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랬다면, 좀 주춤했을까? 오히려 더 반발하지 않았을까?

이미 뜻이 확고하기도 했지만,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원가족들은 물론이고 친구도. 그래서 굳이 알리지도 않았다.


여행도...

시간과 돈만 있으면 이렇게 손쉽게 대륙 반대편 끝으로 날아갈 수 있는 거였다. 마침, 시간이 넘쳤고, 재산 분할로 인해 수중에 돈이 들어온 상태였다. 원래는 캐나다에서 아이와 쭉 살 작정이었는데, 아이가 원치 않아서 포기했다.

그냥 물 흐르듯 넘어갈 수는 없었을까. 그러나 뭔가 매듭을 짓고 넘어가야 앞으로 제대로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인생의 다음 챕터를 써내려 가기 위해서는 말이다.

이렇게 거창하게 변명할 것도 없이, 늘 회피하고 도망치던 나는 몬트리올에서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다시 어떻게든 이 땅을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최저가 항공권을 끊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 있었다. 그런데 파리에서 머물 4일 치 호텔 비용을 계산하고 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무서운 액수였다. 식비, 교통비는 아직 계산에 넣기도 전이었다. 이대로 정말 생활이 가능할까?


그제야 새삼 내 현실, 처지가 실감 났다.

줄곧 여행이 아니라고 말을 해왔으나, 진심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유럽에서의 멋진 여행. 좋은 뷰가 있는 호텔, 뷔페식 아침, 박물관, 미술관 나들이, 유명 관광지 근처 레스토랑에서의 맛있는 점심 식사, 폼나는 인증샷... 을 조금이나마 기대했을지 모르겠다.


파리드골 공항에서 오페라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차창 너머로 찍은 사진. 한국 시간으로 크리스마스이브 오전에 출발해서 프랑스 현지 시간으로 같은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에 도착했다.


그런 어둡고 불안한 마음을 밀어낸 건, 글쓰기에도 부끄럽지만 파리 남자들이었음을 밝힌다. 제아무리 멋있게, 쿨하게 <홀로서기>를 시작하고 싶었어도, 그때의 혼란스럽고 나약했던 본모습을 부인할 수가 없다.

시원하게 비워냈다고 믿었으나 아직은 허전했던 마음속 빈자리를, 찰나의 친절함들이 메꿔주었다.

앞으로는 나 혼자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나아가야 한다. 각오한 일이고, 어쩌면 원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닥치니 아직은 서툴고 힘에 부쳤다. 게다가 원치 않게도,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한 내 아이에게도 제 몫의 캐리어를 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


약자를 돕는 사회적 배려 때문인지, 아니면 여성을 대하는 몸에 밴 매너 때문인지, 공항에서부터 예약해 둔 파리 시내 변두리 호텔에 이르기까지, 파리 남성들의 이어지는 에스코트를 받아 무사히 도착했다.

특히 마지막, 호텔이 있던 Bolivar역에서 도와준 그 사람!


아직도 두 눈에 선하다. 세계적인 배우이면서도, 특히 한국에서는 한때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기 남자 배우로 잘 알려진 뱅상 카셀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일행을 잠시 세우더니, 내 짐과 아이의 짐을 각각 한 손씩 거머쥐고는 샤프하고 시원한 몸놀림으로 이동하기 편한 자리까지 탁 옮겨주고는 파란 눈동자를 마주쳤다. 가벼움이라고는 없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 아, 너무 감사드립니다!

- 프랑스에 여행 오셨나요?

- 네.

- 프랑스는 멋진 곳입니다. 머무시는 동안 좋은 여행되세요!

- 네, 너무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이게 소설이라면, 정말 그 사람이었다고 시작하고 싶다.


목적지인 남프랑스로 떠나기 전, 파리에서 4박을 하기로 했다. 숙박료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시내 변두리 지역에 호텔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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