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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Sep 14. 2019

어느 멋진 하루 (2)

치앙마이 한 달 살기


혹시 하고 싶은 활동이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요.


치앙마이에서 게스트하우스나 호텔에서 묵게 되면 항상 따라오는 말이다. 체크인 과정이 끝난 뒤에 숙박하는 동안 알아두어야 할 점들을 설명한 후에 인자한 미소와 함께 꼭 덧붙인다. 네, 그럴게요. 역시 적당한 미소로 인사치레를 하지만 글쎄, 하고 싶은 활동이 '생기면' 모를까, 라는 마음이다.


치앙마이에서 할 수 있는 것들


두 달 전 치앙마이를 처음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맞아준 스탭은 중년의 여성분이셨다. 인상 깊었던 것은 집중해서 귀를 기울여야만 들릴 정도로 작은 데시벨에 나긋나긋한 목소리. 와이파이 비번부터 조식을 먹을 장소까지 필요한 사항들을 설명해 주신 뒤 직접 방으로 안내하겠다고 나오셨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팔짱을 끼는 것이 아닌가! 이미 알고 지낸 사이처럼 팔짱을 끼고 나를 이끌면서 특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유 해브 애니 플랜?


아니요, 딱히 정해진 계획은 없어요. 그때부터 몇십 미터를 걸어가는 동안 그녀의 다정한 비즈니스가 시작되었다. 나는 이런 걸 해 줄 수 있어, 너도 들어봤을 거야. 이런 거, 아니면 저런 거, 어떤 거든 내가 연결해 줄 수 있어, 언제든지 말하렴. 그 뒤로 며칠 동안 그녀는 나를 보기만 하면 오늘의 계획을 물었다. 두 유 해브 애니 플랜. 나중에는 저 멀리서 그녀만 보이면 나긋나긋한 목소리의 문장이 떠올랐다. 두 유 해브 애니 플랜.


좋은 게 좋다는 생각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감정을 낭비시키는가.


다른 사람이 나의 시간과 경험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싫다면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내야 한다. 두 유 해브 애니 플랜, 을 계기로 여행에서 원하지 않는 관심을 끊어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첫 만남에서 내가 지향하나는 여행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이야기할 것. 나는 특별한 투어나 프로그램을 원하지 않아.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기고 싶어. 저스트 릴랙스. 릴랙스 할 거야.



덕분에 Baan Heart Thai에서 머무르는 동안은 마음껏 자유로울 수 있었다.


숙소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와 1층 공용 공간에 자리를 잡는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노트에 메모를 하기 시작한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기에 가장 좋았던 자리는 창가를 바라보는 자리. 창가 너머로는 아이보리색 담장이 이어진다.


9월의 치앙마이는 우기의 끝자락에 매달려있다. 우기라고 해서 우리나라의 장마 기간처럼 계속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쏟아지다가도 어떤 날은 30분 정도 와르르 쏟아진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그동안 뜨겁게 달아올랐던 기온도 떨어지기 때문에 창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그런 날 열린 창문으로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다 보면 몇 시간이고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열린 창문으로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다보면 몇 시간이고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빗소리가 좋아서 찍어둔 영상 하나 더. 숙소 정문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한참 집중해서 책 속의 이야기에 빠져들 때, 아니면 그동안 쌓였던 갈등들이 터져 나오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싶을 즈음, 저녁을 먹을 시간이 찾아온다. 하루에 한 끼는 그래도 욕심을 낸다. 날마다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고 그랩을 호출해서 맛집 탐방을 다녀온다.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슈퍼마켓으로.



쪼르르 늘어선 슈퍼마켓들.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코너에 위치한 이곳을 단골 삼았다.



편의점이 아닌 슈퍼마켓을 마지막으로 이용한 것이 언제일까. 무더운 날씨에 지나가는 사람을 유혹하는 커다란 냉동고가 바깥에 나와있고 안주거리 혹은 간식거리가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숨은 물건 찾기에 지쳐 'OO 있어요?'하고 물으면 주인장이 단번에 위치를 알려주는 곳. Dara Restaurant와 Mama's Restaurant의 중간 지점에 어릴 적 추억 속의 그곳을 닮은 슈퍼마켓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코너에 위치한 슈퍼마켓을 단골 삼았다.


자주 들르다 보니 이제는 멀리서 눈만 마주쳐도 알아보신다. 안녕하세요. 싸와디 카. 이거 주세요. 얼마예요? (계산기를 두드리신다.) 210밧. 감사합니다. 코쿤 카. 소리 내어 나눌 수 있는 대화는 짧지만 마음으로 나누는 대화는 조금씩 길어진다. 반가운 표정으로 맞아주시고 어디선가 보고 들은 태국어를 써먹으려는 우리를 기특하게 바라보시고. 이제는 다른 곳을 가기 위해 그 골목을 지나가다가도 인사를 한다. 매일의 시간이 쌓여 우리는 조금 아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새 어둠이 자리 잡은 밤. 맥주와 안주거리를 사들고 숙소로 돌아온다. 이번에는 공용 공간의 중앙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치앙마이 곳곳을 부지런히 돌아보는 여행자들은 10시 즈음 숙소로 돌아온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피로를 풀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헬로, 하이. 돌아오는 게스트들과 짧은 인사를 나눈다. 이미 대화를 나눈 적 있는 이들은 가끔 자신의 하루를 들려준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 있었고, 그것이 얼마나 흥미진진했는지.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크리스피 포크, 쏨땀, 꼬치구이, 망고스틴 감자전


바삭바삭한 돼지고기 튀김, 시큼하면서 매콤한 쏨땀, 새콤하면서 달콤한 망고 스틴까지. 맛있는 안주거리는 끝이 없다. 맥주를 홀짝이다 보면 어디선가 오토바이 소리가 들린다. 핫핑크색 유니폼을 입은 푸드 판다! 알고 보니 스탭이 주문한 야식이었다. 게스트하우스 스탭은 정해진 스케줄에 맞춰 5-6명이 근무를 했는데 이렇게 야식을 시켜먹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래, 이 시간이 되면 언제나 배가 허전해지지. 또다시 서로의 마음을 알아보는 미소.


이제 퇴근할 건데, 이것만 부탁할게.


스탭들은 12시가 넘으면 퇴근 준비를 했다. 마지막 청소를 하고 컴퓨터를 끄고 문단속을 하고. 하루에 한 명씩, 혼자서 게스트하우스를 지키던 스탭은 12시 30분이면 자유의 몸이었다. 어차피 이곳은 입구부터 카드를 대야만 들어올 수 있으므로 에어컨과 불 끄는 것이 마지막 남은 자의 임무였다. 사용한 컵과 그릇을 설거지해서 원위치로 돌려놓고, 빨간색 스티커가 붙은 것만 남기고 모든 불을 끈다. 화장실에서 개운하게 씻고 도미토리 안 어두운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조용히, 살금살금.


여전히 알람을 맞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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