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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Oct 30. 2019

그녀의 편지가 길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

『이토록 긴 편지』, 마리아마 바

아이사투, 네 편지를 받았어.
답장 대신에 내가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의지하게 되는 이 노트를 펼쳐 들었어. 
- p.9


『이토록 긴 편지』는 세네갈에서 평생을 산 50대 여성 라마툴라이가 친구 아이사투에게 보내는 편지의 모음이다. 소설은 화자 라마툴라이가 남편이 사망한 사실을 아이사투에게 알리면서 시작한다. 이슬람 전통 방식으로 치러지는 세네갈의 장례 문화에 대해서 생각보다 자세한 묘사를 접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49제를 지내듯이 이 곳에서는 40제를 지내는데 장례식의 풍경과 분위기, 부조금 문화 등이 현대 한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각 무리마다 과시하듯 부조금을 내놓았지. 예전에는 이런 도움을 현물로 주고받았잖니. (...) 요즘은 보란 듯이 지폐로 과시하며 저마다 다른 사람보다 적게 내놓지 않으려고 들지. 셈할 수 없는 마음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돈으로 외면화되고 있어! 지금도 난 생각해. 장례식을 잔치처럼 만들지 말고 가족이나 친구가 차라리 처방 약이나 입원비를 대주었다면 얼마나 많은 고인들이 살 수 있었을까 하고 말이야. / 부조금은 세심하게 기록되지. 똑같은 상황이 되면 갚아야 할 빚이니까. 
- p.19


장례식에서 어떤 무리와 함께하고, 얼마의 부조금을 내는 것이 각자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준다. 어떤 사람들이 방문하고, 얼마를 부조금으로 걷느냐 또한 장례를 치르는 집안의 지위를 가늠하게 만든다. 고이 봉투에 넣어 전달받은 부조금을 일일이 기록하고 나중의 빚으로 생각하는 것까지 우리네 지금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라마툴라이는 모두(Modou)와 결혼한 지 30년이 넘었고 학교 교사로 지냈기 때문에 도시의 온갖 사회 계층 주요 인사들이 장례식장을 찾았고, 부조금도 최고의 액수로 엄청나게 많은 봉투를 받았다.


물론 우리나라 장례 문화와 다른 점도 많다. 미망인이 된 여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천막 아래에 앉아있어야 하는데, 이때 사람들이 액운을 쫓기 위해 천막 위로 동전을 던진다. 시집 식구들은 그동안 그녀의 행실을 바탕으로 고생한 날들을 칭찬하거나 신랄한 평가를 늘어놓는다. 남편이 죽으면 유산 상속 절차를 거칠 때까지 자신의 모든 재산을 시집 식구들에게 바쳐야 하고, 일부다처제가 허용되기 때문에 여러 명의 부인들이 장례식장에 함께 전시된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40일의 추모의식이 끝나면 혼자 남은 미망인을 시동생이 아내로 거둔다는 점이다. 40제가 끝나자마자 모두(Modou)의 형 탐시르가 라마툴라이를 찾아온다.


자네가 이제 <벗어났으니>(탈상을 암시하는 말이야) 내가 자네를 아내로 거두겠네. (...) 보통은 시동생이 형수를 거두지만 이번 경우는 반대네. (...) 너무 가볍고 너무 젊은 다른 여자보다 난 자네가 좋아. 난 동생에게 그 결혼을 하지 말라고 말렸어.
- p.108-109


비록 5년 전 자신과 아이들을 져버리고 두 번째 부인을 맞이해 집을 나갔지만 30년 넘게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묶여 있던 남편이 갑자기 죽은 지 40일이 지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누구보다도 먼저 그녀를 아내로 만들기 위해 한 달음에 달려온 아주버니를 어떻게 봐야 할까. 소설 속 대사를 통해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또 다른 가족이 만들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 또렷하고 강렬한 그녀의 목소리


그러나 『이토록 긴 편지』는 사회와 관습에 억눌린 여성의 고통스러움만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다. 이 작품을 쓴 작가 마리아마 바는 1929년생이고, 이 작품은 1979년 세상에 나왔지만 작품 속 라마툴라이는 2018년 현재 이슬람 전통 국가의 여성들도 쉽게 하지 못할 말들을 쏟아낸다.

   

난 검은 숄을 꽉 쥐고 염주를 굴렸지. 이번에는 나도 할 말은 할 작정이었어. / 내 목소리는 30년의 침묵을, 30년의 박대를 견뎌 왔어. 격렬하게 터져 나온 그 목소리는 빈정 거리기도 하고 경멸조를 띠기도 했지. 
─ 아주버님은 동생에게 조금이라도 애정이 있으셨답니까? 아직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새 가정을 꾸리시는 겁니까? (...) 아주버님은 제게도 감정이 있고 이성이 있다는 걸, 제가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는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계시는군요.
- p.109-110
아주버님은 저한테 결혼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시는군요. 결혼은 신뢰와 사랑의 행위입니다. 결혼은 스스로 선택하고 또한 자신을 선택한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고스란히 내주는 것입니다(난 선택이라는 말을 힘주어 강조했지). 그러면 아주버님의 부인들은 어떡할 겁니까? (...) 저는 아주버님의 수집품을 채울 생각이 없습니다. 제 집은 결코 아주버님이 탐내는 오아시스가 되지 않을 겁니다.
- p.110


탐시르는 망연자실하게 돌아가고, 30년 전에도 라마툴라이에게 청혼했었던 다우다 디엥이 그녀를 찾아온다. 라마툴라이가 청혼을 거절하자 몇 년 뒤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고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그는 여러모로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그러나 라마툴라이는 세네갈 여성의 인권 문제와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정책과 관련해 그와 치열하게 토론할 뿐, 그의 청혼은 다시 한번 거절한다.


이 소설에는 라마툴라이가 편지를 보내는 대상인 또 다른 여성, 아이사투의 이야기도 많이 등장한다. 아이사투의 서술을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라마툴라이의 편지를 통해 그녀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수집할 수 있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그것도 시어머니가 의도적으로 미성년자일 때부터 데려와 키운 여자를 두 번째 아내로 맞았을 때 아이사투는 이혼을 선택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약사가 되어 홀로서기에 성공한다. 아이사투의 삶이 너무나 드라마틱해 오히려 비현실적이라면 반면에 라마툴라이의 삶은 충분히 현실적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현실적이면서도 그 현실과 치열하게 싸워나가는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 차이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이야기의 힘


라마툴라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엄마로서 고민하는 것들도 현대의 우리와 비슷하다. 이성교제를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언제 어떻게 성교육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태연한 척 이야기를 꺼내지만 여전히 어색하고 서툰 엄마. 딸들이 죄책감과 품위를 잃는 일 없이 사랑을 알게 되기를 바라며 부모와 함께 하지 않아도 외출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만 담배 냄새를 쫓아다니며 혼을 내는 엄마. 다른 사람들의 간섭에 휘둘리지 않고 훈육을 해야 할 때와 아이의 생각을 존중해야 할 때를 아는 현명한 엄마.

     

아프리카, 이슬람, 1979년. 어느 것 하나 나와 연결 지을 수 있는 단어는 없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라마툴라이와 같은 시대를 사는 기분이 들었다. 좋은 글은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지녔다고 믿는데 『이토록 긴 편지』도 그러하다. 책장을 넘길수록 차분한 어조로 삶의 고뇌를 털어놓는 그녀의 편지가 이토록 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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