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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Oct 30. 2019

내가 나일 수 있는 공간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 에스키벨


# 전통을 이유로 포기해야 하는 것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멕시코의 가정에서 강요되었던 전통을 이야기하며 시작한다. ‘막내딸은 반드시 어머니를 봉양해야 하며 결혼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난 티타는 사랑하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가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단 하나, 전통을 깨서는 안 된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티타는 자신의 한을 요리로 풀어낸다. 부엌은 티타의 감정을 풀어내는 공간이자 가장 큰 힘을 갖는 공간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통, 한, 요리, 부엌, 사랑. 페이지를 넘길수록 어릴 적부터 보았던 우리 집의 모습들이 자꾸만 겹쳐 보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스무살이 되어 서울에서 혼자 떨어져 살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특히 평생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충격을 받았다.


예를 들자면 우리 집은 해마다 여러 번 차례와 제사를 지냈다. 명절 전날 집안 여성들이 우리 집에 모였고, 짧게는 3-4시간, 길게는 6시간 정도 음식을 준비했다. 명절에는 모든 가족들이 우리 집에 모여 아침 일찍 차례를 지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성묘도 다녀와야 했다. 장을 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틀 이상을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보내는 것은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일이었다. 이 모든 과정이 1년에 최소 2번, 너무나도 당연하게 반복되었다. 피로가 쌓이고 묵혀두었던 감정들이 터져 나오는 시간. 나에게 명절은 이런 의미였다.


서울에 와서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면서 생전 처음으로 명절이 누군가에게는 '쉬는' 날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엄마, 이번 연휴에는 OO를 하려고.'라는 말을 하며 자신만의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날이라는 것도.     


맏며느리라는 이유로 반평생 모든 제사와 차례 음식 준비를 도맡은 엄마를 보면서 나는 마음이 복잡했었다. 내가 전통을 물려받기는 싫었지만 같은 여자로서 엄마가 조금이라도 덜 힘들기를 바라며 일을 도왔다. 그것도 십 년 정도 하다 보니 이제는 제사 음식만 준프로처럼 할 수 있게 되었다. 명절마다 '이렇게 음식을 잘하니 시집을 잘 가겠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기쁘지만은 않았다. 이제는 사서 먹자고 이야기한 지 10년이 넘어가지만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나 또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항상 음식 하는 날에 맞춰 집에 내려가는 표를 구하기 때문에.     




# 부엌이라는 공간의 의미


티타에게 부엌은 자신의 존재감이 가장 커지고 자유로워지는 공간이었다. 어떻게 해야 이 음식이 더 맛있어지는지를 알고 있고, 그것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주도권을 쥐고 있는 공간이다. 독립하기 전까지 나에게 부엌은 엄마를 도와야 하는 곳이었다. 어떤 양념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재료는 써도 되고 어떤 재료는 안 되는지, 어느 타이밍에 불을 꺼야 하는지, 중요한 결정들은 모두 물어보고 따라 해야 하는 공간이었다. 그걸 10년 넘게 했더니 이제는 내 마음대로 조절하는 부분이 조금이나마 생겼다. 그렇다면 우리 집 부엌에서 30년 넘는 시간을 보낸 엄마에게 부엌은 어떤 의미일까.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함께 다룰 수 있는 주제가 다양한 소설이다. 이국적인 요리의 힘과 매력에 대해서 논할 수도 있고, 음식으로 표현된 인간의 감각과 욕망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멕시코의 역사와 여성 문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고, 페드로-티타-존의 관계나 라우-페드로-티타 같은 관계를 다시 되짚어보면서 사랑에 대해서만 논해도 시간은 훌쩍 갈 것이다.


그러나 전통과 가족이라는 주제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살펴보면 ‘요리’, 음식을 창조해내는 행위가 티타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 티타는 부엌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내면서 유일하게 자유를 느꼈다. 티타가 결국 조카를 통해 대대로 내려오던 전통을 끊어낸 것은 희망적인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티타가 요리를 만드는 과정, 각 챕터마다 소개되는 레시피를 통해서 멕시코 전통 요리들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은 덤이다. 이 책을 덮고 나면 '멕시코 요리', '멕시코 음식점'으로 검색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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