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 절대적 권위의 존재, 아버지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 있다. <엠네스티 월드>에서 수여하는 인권상을 받고 독재 정부의 비리를 낱낱이 고발하는 언론사를 운영한다. 종교 단체뿐만 아니라 자신과 연결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거액의 돈도 아낌없이 기부한다. 국가의 민주화와 종교적인 원리에 대해 무서우리만큼 공고한 신념을 갖고 있고 실제로도 자신이 세운 원칙을 철저하게 준수하며 모범적인 삶을 산다. 명절이나 큰 행사가 있는 날이면 그에게 도움을 받아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이들의 인사와 보답이 줄을 잇는다.
그러나 그는 토속어를 사용하는 것을 교양 없는 것으로 여기고 반드시 정식 발음을 준수하는 영어를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교를 믿고 따르는 것에도 방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정한 규칙을 반드시 지켜야 하고 이보어를 사용하는 것은 경박한 행위라고 배척한다. 전통 신앙을 유지하는 삶은 이교도, 우상숭배로 취급하고 말을 섞는 것도 불결하게 여긴다. 무엇보다 자신의 기준을 따르지 않는 가족들은 죄악을 선택한 것으로 보고 그 대가로 무자비한 폭력을 가한다. 벨트로 채찍질을 하고, 뜨거운 물로 발을 지지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발길질을 하고, 테이블을 사람 위에 던지더라도, 이 모든 행위가 끝난 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모든 것이 너를 위해서야.'
이렇게나 모순적인 인물이 어떻게 가능한가.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으면서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가장 큰 질문이었다. 종교와 언어, 문화적인 면에서 아버지 유진이 내세우는 기준들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특히 89페이지에서 캄빌리의 외할아버지를 회상하며 백인들의 방식이 곧 '올바른 방식'이라고 되뇌는 장면을 참고하면 그는 완벽한 사대주의자이자 백인 우월주의자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민주주의도 백인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해서 추종하게 된 것은 아닐까? 나이지리아가 지켜온 토속적인 문화가 덜떨어지고 백인의 방식으로 계몽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유진의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어서, 상황에 따라 신념이 바뀌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설명 말고는 그를 이해할 길이 없었다.
# 다른 삶도 가능하다는 희망
캄빌리네가 어디서부터 잘못 꼬였는지 알 수 없는 모순덩어리로 가득 찬 꽈배기 같은 가정이라면 이페오마 고모네는 직선으로 가득한 가정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하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한다. 웃는 것이 자연스럽고 서로 다른 의견을 말하며 투닥거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집. 잘못한 일이 있으면 혼이 나지만 무엇을 잘못했는지, 다음에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설명하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더 길다. 캄빌리와 자자는 은수카, 즉, 이페오마 고모네 라는 전혀 다른 공간을 알게 되면서 처음으로 베베 꼬인 꽈배기 실타래를 풀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캄빌리는 철저하게 아버지 유진의 방식에 길들여진 상태였다. 아버지의 세계가 자신을 끊임없이 아프게 하고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너무나 공고해서 그 외의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전통 신앙을 믿는 파파은누쿠(할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몰래 간직하고 그것을 찢어버린 아버지의 발길질을 끝까지 맞아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아버지가 칭찬할 만한 말을 골라하고 그를 독살한 어머니에게 분노한다. 모든 것에 조심스럽고 신중한 캄빌리. 그래서 뿌리 깊은 모순적 세계에 길들여진 캄빌리가 그것을 풀어가기 위해서는 오빠인 자자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 갑작스러운 결말이 남기는 질문
그러나 작품은 캄빌리가 자기 안의 모순을 풀어가는 속도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스스로 어떤 결정들을 내리고 그로 인한 변화를 만들어 나갈 수도 있었을 타이밍, 그 타이밍에 갑자기 유진이 죽어버린다. 이후 자자가 감옥으로 들어가고 어머니는 예전과 다르게 변해버렸다. 캄빌리는 이제 어머니와 자자를 챙기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자자가 나오면, 다 같이 은수카에 가고, 그리고 미국에 가자고 말하는 캄빌리의 마지막 말은 이도 저도 아닌 결말처럼 들린다. 왜 이렇게 급작스럽게 작품을 마무리 지은 걸까? 결말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독자의 선택으로 남기고 싶었던 걸까?
"왜 우리가 우리나라에서 도망쳐야 해? 왜 고칠 수는 없는 거야?" 아마카가 물었다.
(...) "도망치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행동하는 거지."
-p.281
"고학력자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떠나. 약자들을 남겨두고 가지. 독재자들은 계속 군림해. 약자들이 저항하지 못하니까. 너는 이게 순환고리란 걸 모르니? 대체 누가 이 고리를 끊겠어?"
"그건 궐기대회에서나 먹힐 비현실적인 얘기잖아요, 치아쿠 이모." 오비오라가 말했다.
-p.296
결말 부분을 읽고 이 페이지들이 떠올랐다. 대학에서도 학문의 자유가 지켜지지 않고 정치적인 이유로 억압받으며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 엄마 이페오마를 바라보면서 오비오라는 나이지리아에 남아서 잘못된 사회 문제를 고치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바로 잡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나이지리아를 버리고 편한 세상으로 도망가는 거라고 말하는 이모에게도 그런 말은 현실을 외면한 허황한 것이라고 말할 만큼 단호하게.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킴벌리네 가족을 통해서 삐뚤어진 권위로 가득 찬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혼란스러운 나이지리아의 사회 문제도 드러낸다.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활짝 핀 것처럼, 유진이 절대 군림하는 가정 내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자유를 쟁취하는 것, 그걸 위해서 싸워나가는 것은 '궐기대회에서나 먹힐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던 걸까. 책 뒷면에 적혀있는 것처럼 '정신적 독립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채 끝나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책을 덮고도 더 많은 질문과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타이밍을 놓치고, 약자들만 남은 곳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캄빌리는 꽈배기처럼 꼬여있던 실타래를 풀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자자의 변해버린 눈빛은? 미국 생활은 정말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모순을 품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당연하게 해오던 것과 조금 다른 선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이 책이 생각날 것 같다. 습하고 외로운 베란다의 공기, 차갑고 축축한 히비스커스의 느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