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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Nov 04. 2019

의문의 살인 사건 뒤로 감춰진 이야기

『풀잎은 노래한다』, 도리스 레싱



# 어딘가 숨겨진 상처가 있을 것 같은


연두색의 커버와 '풀잎', '노래한다'는 제목, 자연스레 땋은 올림머리를 한 여성 일러스트는 청량한 느낌의 들판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성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색색의 꽃잎들을 땋은 머리에 꽂고 다니려면 격한 움직임은 할 수 없는 삶을 산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경직되어 있고 행복한 느낌이 아니었다.


게다가 작가가 도리스 레싱이었다. 『다섯째 아이』와 『제19호실로 가다』 등의 작품을 통해 페미니즘과 타자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보여온 그녀였다. 도리스 레싱이 쓴 글과 연둣빛 청량한 들판이라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어딘가 숨겨진 상처가 있고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풀잎은 노래한다』는 의문의 살인사건으로 시작한다.


의문의 살인 사건

리처드 터너(느게시의 농부)의 아내인 메리 터너가 어제 아침 그들의 농장 주택 앞 베란다에서 피살된 채 발견되었다. 경찰이 체포한 하인이 범행 일체를 자백했으나 그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귀중품을 노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독자 투고)
- p.6


어느 신문의 독자 투고 형식을 빌려 시골의 농장 주택 앞에서 한 여성이 죽었음을 알린다. 1장은 경사화 지역 유지, 농장 인수자가 모여 넋을 잃은 남편과 용의자를 데리고 수사를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하나밖에 없는 용의자가 순순히 자백을 하였기에 사건은 쉽게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상한 점이 없었냐고 묻는 경사의 질문에 농장을 인수받기로 되어 있었던 토니는 이렇게 답한다. "이 사건은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딱 잘라서 말할 수 없습니다."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듯이, 경멸과 분노가 섞인 눈으로 죽은 시신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살인은 인정하지만 동기는 밝히지 않는 범인. 그녀의 죽음은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배경이 있고 그것은 엄청나게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는 감이 오지만 독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녀는 이미 죽었기에. 소설은 그녀의 목소리만 쏙 놓고 다른 주변 인물들의 겉도는 이야기만 전하는 것으로 메리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 '메리'라는 여성이 자신을 잃어가는 이야기


이후 아홉 장(2장부터 11장까지)에 걸친 내용은 영국에서 남아프리카의 한 나라, 식민지로 건너와 태어난 메리가 자라서 가정을 꾸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도리스 레싱은 실제로 페르시아에서 태어나 남아프리카의 남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라고 한다)에서 이십 년을 넘게 살았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남편과 두 번이나 헤어지고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했는데, 그녀의 경험이 1950년작 『풀잎은 노래한다』에 많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짐작할 수 있다.


이어는 아홉 장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남아프리카의 시골 농장에서 주체성을 상실한 삶에 익숙해져야 했던 메리가 어떻게 자신을 놓고 미쳐가는지를 그리고 있다. 메리는 사회에서 바람직하다고 평가받는 인간상보다 감정 표현에 서툴고, 어릴 적 부모님을 보면서 결혼을 꿈꾸지 않고 자랐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그녀의 특성들이 사회의 통속적인 모습과 다르다는 이유로 노골적인 조롱을 당하게 된다. 결국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원하지 않았던 결혼을 한다. 도시 생활만 해  그녀가 농부인 남편을 따라 시골의 외딴집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는 원주민 하인을 고용한다.


남편을 따라 집으로 들어가 사는 것, 원주민 하인을 고용하는 것, 모든 것이 그 시대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대로 따랐지만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없었다. 그녀는 사방이 허허벌판인 외딴집, 그것도 엄청난 열기로 끓어오르는 집에 갇혀 집안일도 할 수 없고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무엇이든 해도 되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삶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살갗이 타들어 갈 듯한 열기의 집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그녀는 육체와 정신이 모두 마비되어 간다. 결국 첫 번째 장에서 등장한 '의문의 살인 사건'으로 가기 위해.

『풀잎은 노래한다』가 『다섯째 아이』보다 길고 여자 주인공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분량이 더 많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에서 서서히 미쳐가는 여성의 변화가 훨씬 잘 드러난다. 페미니즘 단편 희곡 <Trifles(사소한 것들)>이 떠오르면서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있었다. (<사소한 것들>은 부인이 남편을 죽인 살인 사건 현장에서 시작한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혐오의 시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1장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메리와 리처드의 집에 도착한 경사와 지역 유지 찰스는 분명하고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고 받는다 정신적 충격으로 말을 잃은 남편 리처드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유력한 살인 용의자는 분노를 담은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살해당한 메리의 시신을 경멸과 분노에 찬 눈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당해도 싸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의 태도를 보면 도대체 그녀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궁금해진다.


이어지는 메리의 삶을 보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메리의 잘못이라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손가락질 받는 것을 무시하지 못하고 경솔한 결혼을 했다는 것? 이후 여러 번의 갈림길에서 운명을 바꾸지 못하고 수동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 그러나 메리는 허허벌판의 농장에서 걸어나와 도망치려는 시도도 했고, 아기를 가져보는 건 어떠냐고 남편에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주어진 상황에서 다른 가능성을 찾으려는 시도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을 뿐.


당시 사회에서 어울리지 않는 여성을 어떤 식으로 몰아가는지에 대한 묘사도 적나라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제국주의 시절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들을 어떤 식으로 이용하고 유린하는지 또한 드러난다. 찰스에게 소개 받아 리처드가 운영하는 농장을 인수받으러 온 '토니'라는 인물은 영국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진보 성향의 젊은이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 넘어온 남아프리카에서 자신이 배우고 믿었던 도덕적 개념들이 모두 무너진 광경을 목도한다. 그런 광경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백인으로서의 권위를 내세 원주민들을 부리는 삶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메리가 여성으로서 사회의 중심에서 도태되고 방치되고 있으면서도 원주민들을 증오하고 경멸하는 모습 또한 흥미롭다. 그녀하인에게 온갖 신경질을 부리면서 막 대하고 더 이상 괴롭힐 게 없으면 분통이 터질 듯 부들거린다. 자신의 존재가 쓸모없다고 느껴질수록 더 강렬하고 파괴적으로 혐오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원주민인 하인들에게 쏟아내는 혐오는 그녀가 평생 동안 당연하게 주입받아온 계급의식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여성으로서 자신의 자유가 박탈된 것에 대한 분풀이를 더 약한 자에게 돌리는 것일까? 결국 차별받는 여성이 차별받는 원주민을 학대하고 차별하는 백인 남성은 그녀를 지키기 위해 차별받는 여성과 원주민을 떨어뜨려 놓는다. 보통 복잡한 문제가 아니다. 도리스 레싱은 이처럼 몇 배로 배배 꼬인 관계를 작품에 담아냈다.

메리가 자신의 자아를 잃고 미쳐가는 모습, 그리고 결국에는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는 모습에 어디까지 공감할 수 있느냐도 중요하지만, 『풀잎은 노래한다』는 거기에 더해 커다란 질문을 하나 더 남긴다.  차별받는 집단이 다른 집단을 차별하는 것은 별개의 계급 문제인가? 다층적 혐오 문제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게다가 이 작품은 영국인들의 입장, 토니와 남편, 찰스와 메리의 마음까지는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지만 범인 모세를 비롯한 원주민들의 마음은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철저히 관찰자의 시각으로 묘사될 뿐이다. 이것을 이 책의 한계라고 봐야 할지, 그 시대의 현실을 잘 그려냈다고 봐야 할지. 아니, 그 시대의 현실이 품고 있던 한계였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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