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인딩 포레스터」에서는 단 한 편의 소설을 발표하고 잠적해버린 세계적인 작가 윌리엄 포레스터와 작가의 꿈을 혼자서 조용히 키워가던 고등학생 자말이 등장한다. 여러 모로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샐린저를 연상시키는 윌리엄이 자말과의 만남을 통해 세상을 향해 쌓아 왔던 회의와 불신을 벽을 조금씩 허무는 과정이 감동적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윌리엄이 자말에게 처음 타자기를 내어주던 순간이다.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의 장면
자말은 문학을 사랑하고 작가가 되고 싶은 꿈을 꾸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다.그러나 누구보다도 책을 많이 읽고 항상 노트에 글을 쓰며 꿈을 키워왔다. 그러다 윌리엄에게 일종의 작문 수업을 받게 되는데, 그는 타자기를 내어주며 별 일이 아니라는 듯이 말한다. 그냥 손이 가는 대로 쓰라고. 생각할 것 없이 손가락이 가는 대로 타자기를 치다 보면 어느새 글이 완성되어 있을 거라고.
문학적 재능, 창작을 향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부러움과 동시에 좌절감을 느끼게 만드는 장면이다. 그냥 타자기를 치라고? 그러면 글이 손 끝에서 물 흐르듯 흘러나온다고? 게다가 머뭇거리던 자말은 곧 손가락을 자유롭게 놀리며 악기를 연주하듯 글을 써 내려간다. 오, 제발, 이건 영화라서 그렇다고 말해주세요.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세계적인 시인 네루다와 네루다가 사는 섬의 우편배달부 마리오의 만남을 그렸다는 점에서 「파인딩 포레스터」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파인딩 포레스터」의 자말과 달리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의 주인공 마리오는 지극히 평범하다. 문학적 재능이나 꾸준한 노력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보통의 사람들보다더 게으르다.그는 '뇌쇄적인 여주인공들 뺨치는 여인과 화끈한 사랑을 나누는 꿈을 꾸고' '아무런 낙 없이 빈둥'거리기를 좋아하고 '쌈박한 일'을 찾는다. 같은 섬에 살고 있는 세계적인 시인 네루다에게 사인을 받고 싶은 이유도 앞으로 '알게 될 미지의 절세미인들에게 그 사인으로 폼을 재기 위해서'였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영화화한 <일 포스티노>의 한 장면
# 메타포는 교과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평범한 마리오가 네루다를 만나 시의 세계로 들어간다. 우연히 베아뜨리체를 만나 사랑에 빠진 마리오는 네루다와 대화를 나눈 뒤 단어들이 넘실거리는 느낌을 경험한다.네루다는 시가 자연과 인간의 삶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여기 이슬라 네그라는 바다, 온통 바다라네.' '잠잠히 있을 수는 없네. 나는 바다고 계속 바위섬을 두드리네.'(p.30) 네루다가 읊는 시는 그냥 거기 있는 자연을 닮았고 마리오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을 닮은 언어와 가까워진다.
네루다의 말처럼 메타포가 한 사물을 다른 사물과 비교하면서 말하는 방법이라면, 메타포는 멀리 있지 않다. 어떤 것이든 그것이 가지고 있는 1차원적 의미 말고 '이런 뜻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메타포, '은유'가 된다. 얼마 전에 봤던 영화 『벌새』에서 은희가 허겁지겁 먹어대는 감자전은 엄마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고, 소파 아래에서 발견한 유리조각은 가까운 곳에 숨어있는 일상의 균열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조커』에서 조커의 춤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그는 왜 분장을 할까?문학이나 영화, 드라마처럼 픽션이 포함된 작품들을 나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려면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것들이 은유적으로읽힌다. 메타포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읽히느냐가 그 작품의 재미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칠레의 민주화를 위해 정치계에 입문하면서 섬을 떠난 네루다는 마리오에게 매일 마주하는 자연의 소리를 녹음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해변의 파도 소리, 바람이 부는 소리, 매일 지나던 길의 북적이는 사람 소리와 갑자기 터져 나오는 아기 울음소리까지. 마리오가 녹음한 순간들은 평범한 일상이 어떻게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는지 보여준다.
여행을 가서 창 밖으로 들리는 빗소리가 좋아서 가만히 영상을 찍은 적이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밤하늘에 보이는 달이 그날따라 너무 가까이 있는 것 같아서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흘러가지 않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어떤 대상, 풍경에 의미를 입히고 있지 않을까?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평범한 섬 청년 마리오가 본능적인 삶을 이어가면서도 인생의 메타포를 깨우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이야기하기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이 쿠데타로 무너지는 1973년 전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70년 선거에서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단일화를 성공한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것은 선거로 선출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었는데, 3년 후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피노체트와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일주일 만에 3만 명 넘는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살바도르 아옌데 또한 저항 과정에서 죽게 된다.
실제로 쿠데타가 일어난 지 12일 후 네루다도 세상을 떠나는데,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서는 이 모든 정치적 상황이 자세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섬에서 살고 있는 마리오는 그저 네루다가 정부에서 일하게 되어 섬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 반갑고, 급격하게 나빠진 네루다의 건강을 걱정한다.
다만 검은 옷을 입은 군인들이 돌아온 네루다의 집 주변을 감시하고 있을 뿐이다.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뒷문으로 네루다의 집에 들어가 임종을 지켜본 마리오를 검은 옷의 군인들이 데려가는 장면에서도 그 어떤 설명이 없다. 그가 왜 사라지는지, 돌아오기는 하는지, 남아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지, 그렇다면 마리오와 네루다의 관계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 모든 것을 독자의 상상과 해석에 맡긴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다 보면 칠레의 자연과 칠레 사람들의 삶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소설에서 그려지는 섬은 너무나 아름답고, 여유롭고 즐길 줄 아는 마리오와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는 정겹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라는 실제 인물과 쿠데타가 일어나던 역사적 시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동시에 순수한 문학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남미 문학은 흔히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말로 대표되며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는 편인데 이 작품은 마술적 리얼리즘과 거리가 멀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지극히 평범한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하지 않는 방식으로 칠레의 역사와 정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고 실제로 네루다가 묵었던 '이슬라 네그라'를 찾아보면 어느새 그곳을 여행하는 모습을 그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문학으로 세계일주' 프로젝트에 가장 어울리는 작품이 아닐까.